눈은 원래 강원도의 것이나
어찌된 일인지 요며칠 동안 눈은 계속 남쪽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어제(12월 15일) 나는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눈소식의 자장에 끌려
결국 집을 나서고 말았다.
나는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차표를 끊었다.
내가 머리 속에서 생각해둔 곳은 계룡산의 갑사였다.
그곳에 눈이 내렸다면 나는 갑사를 둘러보고 계룡산까지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주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나는 다시 부여행 버스로 갈아탔다.
곳곳에서 눈이 눈에 띄었지만
눈은 세상을 덮은 것이 아니라
그저 옹색하게 세상의 한 귀퉁이에 쭈구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부여에 도착한 나는 다시 장항행 버스표를 끊어야 했다.
부여행 버스 속에서 운전 기사와 승객이 나눈 대화가 나를 장항으로 이끈 실마리였다.
“장항은 엄청나게 눈이 왔다지요.”
장항행 버스가 어느 정도 달렸을 즈음
버스의 차창으로 눈발이 히끗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눈의 세상을 보았다.
장항에 내린 나는 곧바로 버스를 뒤집어 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장항에서 출발하여 서천을 지난 뒤에 내린 판교란 곳이었다.
나는 왜 남쪽으로 남쪽으로 그곳을 찾아간 것이었을까.
눈이야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올겨울 서울에도 내리지 않을까.
내가 찾아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게 정말 눈이었을까.
눈은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논에선 추수를 한 뒤에 남겨진 벼의 밑둥치들이
덮인 눈위로 목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내 기억에 눈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 위로 파란 하늘이 쨍하고 나타났을 때였다.
그때면 하얀 세상의 눈빛에 투명한 햇볕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하얗게 보였다.
낮으막한 산 속으로 길의 윤곽 하나가 이어져 있었다.
다닌 흔적은 있었으나
그 흔적도 어느 정도 지워져 있었다.
나는 철도 건널목을 건너 그 길을 따라갔다.
눈은 세상을 덮는다기 보다 나뭇가지 위에서 하얗게 피어난다.
산속으로 난 길을 넘어가자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나타났다.
길은 나무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세 집 정도가 있었던 기억이다.
나무는 평생 동안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이리저리로 가지를 뻗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나무가 어디로, 얼마나 어지럽게 가지를 뻗든
눈은 어김없이 그 가지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어김없이 하나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눈은 가볍다.
가는 나뭇가지에 넉넉하게 올라앉고도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인다.
굴뚝 위는 위험하다.
그러나 굴뚝은 위험 신호를 미리 보낸다.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 신호인 셈이다.
이제 저녁이었지만 아직 연기는 없었다.
눈은 안심하고 그 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차가운 양철 지붕 위의 하얀눈.
설마 눈의 무게로
양철 지붕의 한가운데가 내려앉은 것은 아니리라.
그보다는 누군가의 무게로 힘들었던 기억을
오늘 그나마 눈이 덮어 달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으리라.
눈은 하얗고
고드름은 투명하다.
마을의 우물터를 가린 지붕에도 하얗게 눈이 덮였고,
처마밑으로는 고드름이 조심스럽게 길게 다리를 뻗었다.
지붕 위의 눈은 세상의 깊이가 궁금했던 것일까.
한 녀석의 궁금증이 다른 녀석들의 궁금증을 부채질 했을 것이다.
미처 다리 뻗을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한 녀석은
아예 바깥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래 너희들의 투명함으로 재본 세상의 깊이는 어떻든?
어느 집의 봉당에선
눈을 쓸던 빗자루 하나가 눈을 맞고 있었다.
마당은 이미 모두 흰빛에 묻혔고
빗자루도 하얗게 덮이고 있었다.
세상을 이렇게 일색으로 덮기는 어렵다.
초록이 지천일 때도 세상의 색을 초록이 독차지하진 못한다.
그러나 눈이 오면 세상은 하얗게 덮인다.
마을을 나와 산을 내려오고,
들어오던 길로 다시 나섰을 때
눈발은 완연히 굵어져 있었고,
멀리 내가 들어온 철도 건널목에서
빨갛게 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더욱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의 기세는 더욱 거세진다.
마치 세상을 흰색으로 집어삼킬 태세이다.
시인 오규원은 눈이 왔을 때의 세상을
단색의 독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했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세상이 모두 흰색으로 일색이 되어 버리니.
그러나 그 말은 눈에 대한 오독이다.
그는 눈이 왔을 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건 사람들이 자학적 성향이 있어 독재의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눈이 오는 날 세상은 단색이 지배하는 독재의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제 색을 내놓고 흰색으로 하나된다.
우리에겐 그렇게 이중의 욕망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제 색깔을 갖고 살고 싶어하면서도
또 나를 버리고 모두가 하나되고 싶어한다.
세상의 것은 모두가 제 색깔을 갖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색을, 논은 논의 색을, 길은 길의 색을.
나는 나의 색을, 너는 너의 색을, 그녀는 그녀의 색을.
색이 선명할수록 그 경계는 더욱 날이 선다.
그러나 눈은 그 모든 색을 덮어 세상을 일색으로 만들어버린다.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그러나 그 일색으로 덮힌 세상에서
나는 나의 색을 잠시 덮어두었을 뿐
나의 색이 뿌리를 뽑힌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나는 왜 눈을 찾아 소갈증 환자처럼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었을까.
나는 나의 색으로 살고 싶은 한편으로
세상과 일색으로 하나되고 싶은 이중의 욕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나의 색으로 살고 싶은 한편으로
나의 색을 지우고 너와 하나의 색으로 덮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눈에 지워지는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는 하얗게 지워지고 싶었다.
기차가 온다.
아마도 장항을 거쳐 군산으로 가는 기차일 것이다.
오늘 이곳을 지나는 모든 기차는 눈꽃 열차이다.
기차가 간다.
아마 기차 속의 사람들도 기차에서 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얗게 지워지고 있는 세상을 차창으로 보며
그들도 그 속으로 뛰어내려 하얗게 지워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제 갈 길을 가야하면서,
제 색의 삶을 살아가야 하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다.
그렇게 눈이 온 세상처럼 하얗게 지워지고 싶은게
우리들이다.
기차가 간다.
그 하얀 눈꽃 세상의 한가운데로.
하얗게 지워지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싣고.
원래의 마감은 15일까지였으나
19일로 마감 날짜를 미루어놓은 원고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날 이곳의 마을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차들을 벌벌 기었고 부여까지 가는 길은 더디었지만
나는 눈꽃 세상의 한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어 좋기만 했다.
차창 밖에 온통 하얀 세상이 있었다.
14 thoughts on “눈을 찾아서 – 충남 판교면 후동리에서”
아 동네가 저희 동네인데 우리집 마당도 찍으시고 반갑네요
고향을 이런곳에서 보니 ㅋ
아름다운 곳을 고향으로 두셨군요. ^^
잘 봤어요
내고향,,
충남 서천,판교면 후동리
어린시절
아니 마을 사람들의 쉼터의 장소
큰 느티나무..
그림으로 보니 더 정겹네요
우리집두 나오구~~ㅎㅎ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무작정 떠났던 길이었는데 좋은 마을 풍경을 만나서 아주 좋았었습니다.
여름에 가도 풍경이 좋을 듯 싶습니다.
논 사이로 흘러가던 길이 아마도 지금쯤 가면 푸른 벼들 사이로 흘러서 또다른 아름다움을 선물할 듯 싶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해야하나요..
아님 내 고향을 찍어서 이쁘게 보이는건지 모르겟네요
나의 친구가 살았던 동네입니다.
어린시절을 판교에서 살았구요…
지금도 나의 부모님이 사는 곳입니다…
추억들이 가물가물 몰려오는듯 하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신다면 더 구석구석
카메라에 담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요.
철길을 건너 논 한가운데를 가로 지른 뒤
산속 숲길을 따라 가서 만나는 마을이라
저절로 사진이 될 수밖에 없는 듯 싶어요.
좋은 곳에서 사셨군요.
들러주신 거 고마워요.
위의 사진에서 기차는 장항까지 가는 기차라고 합니다.
장항이 종착역이라고 하네요.
바로 옆이 군산이라서 더 가는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서울에도 눈이 오네요.
그것도 함박눈이 펑펑.
카메라 둘러메고 나가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원고를 마감해야지.
사진작가같아요. 그 어떤 일보다도 사진찍는게 우선이시니.^^
저 빗자루 밑의 사진은 정말 그림같네요. 흔한 풍경일텐데도 색채때문인가봐요.^^
요며칠 아주 실컷 눈을 만끽하며 살고있어요.
운동다녀올때쯤엔 반짝반짝 빛나는게 어찌나 이쁜지.^^
하늘이 제게 주는 선물같아요. 가을 지났다고 우울해하지말고 즐겁게 살라고.ㅋㅋ
그게 바로 눈의 신비인듯.
눈이 내리면 흔한 풍경이 한번도 본 적 없는 눈부신 풍경으로 탈바꿈을 하죠.
그래도 원고 마감을 위해 올라왔으니 사진작가는 아니죠, 뭐. 오늘은 초고를 써야 하는데…
언젠가 저도 열차안에서 내가탄 열차의 머리를 잡아보려던 적이 있었지요^^ 왼통 시끄러운 일상들로 머리 혼란하던 차에 쉬게 해 주심에 감사.제 어머님 돌아가시던 지난해 삼월 .. 백년만의 폭설이라던가요…병원에서 창을 통해 보는 내리는 눈에 가슴졸이던 기억이….. 그 눈 따라 어머님 돌아가시고 말았거든요….날이 지리하게 춥네요. 영,육간에 건강 균형잃지 마시길…
매일 제 건강을 걱정해 주시니 고맙기만 합니다.
너무 눈이 많이와서 남쪽 지방이 걱정이 많다니 그것 또한 걱정입니다.
눈이 강원도로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눈이 정말 많이 왔네요.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가는 모습이 들뜨게 하는데요. 눈이 발을 덮을만큼 쌓이면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눈속에 드러누워 버리고 싶은 마음은 참 많았는데 한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서울살이가 기회를 주지 않더라구요.
위의 사진을 보니 저 곳에서는 할 수 있을거 같은데… 사진에 드러누울 수도 없고, =,.=;;;
숲속 길로 걸어갈 때 무릎 정도까지는 발이 빠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