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2년 10월 13일 목요일 명동에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문화제에 함께 했다. 노동자들의 집회는 단순히 쫓겨난 노동자들이 모여 원직 복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자리가 아니다. 집회는 항상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보여준다. 때문에 집회를 하는 동안 그 자리의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산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는 세종호텔 앞에 자리한 농성 노동자들의 천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천막의 글귀는 “사람이 우선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암암리에 돈이 먼저다. 자본가들의 세상은 더더욱 그렇다. 아니, 자본가들이 그런 세상을 암암리에 조장한다.
이소선합창단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본 얼굴은 베이스 김종민이었다. 그에게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밥차인 밥통과도 함께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밥통의 밥차가 오자 그가 곧바로 자리를 옮겼고 몸에 밴듯 앞치마를 건네 받았다. 오늘 밥차의 파김치는 누군가가 직접 해서 기부를 했다고 들었다. 때로 밥통은 그냥 밥차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두가 함께 사는 인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이다. 밥통은 그래서 밥통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또다른 베이스 김우진이 나타났고, 테너 나석채는 오늘 사용할 스피커와 마이크를 차에 싣고 나타났다. 지휘자 임정현이 명동역 10번 출구를 올라왔고, 그 뒤로 소프라노 최선이의 얼굴이 보였다. 합창단 대표이자 알토인 김종아가 어느새 나타나 손을 흔들고 있었고 피아노 연주자인 정효도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올라오며 손을 흔들었다. 단순히 사람이 모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모인다는 것은 노래가 모이는 일이었다.
서쪽으로 본 명동 하늘에 저녁 노을이 좋았다. 날씨가 좋으면 투쟁하기 좋은 날이란 말이 이곳에선 습관이 된다. 나도 그 습관을 따라간다. 투쟁하기 좋은 저녁이었다. 노을의 채색으로 칠해진 하늘이 그 투쟁이 오늘의 저녁 하늘처럼 아름다울 것이라고 에고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설치하고 음을 맞춰보는 연습이 뒤따랐다. 무대는 따로 없다. 그냥 사람들이 모이고, 맨 앞자리가 무대가 된다.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곳을 무대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문화제가 시작되고 세종호텔의 노조원 김란희가 발언했다.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고 밝힌 김란희는 노조의 집회가 자신에겐 마치 교회의 예배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주보에 찍힌 이번 주 기도자의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았을 때처럼 노조의 집회를 알리는 안내지에서 이번 주 발언자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똑같이 가슴이 떨렸다고 했다. 형재 자매님으로 익숙하던 교회의 말들이 이제 이곳에서 동지라는 말로 더 익숙하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할렐루야와 아멘으로 매듭지어지던 기도의 끝이 이곳에선 투쟁이란 구호로 마무리된다고 했다. 갑자기 집회는 신성한 예배를 방불하게 되었다. 집회는 노동자의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이 사람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믿음이 굳건했다. 자본가의 하느님은 그와 달리 돈이 우선이다. 돈을 축복으로 여긴다. 어떤 축복도 사람을 앞설 수는 없다. 부당한 해고 앞에서 인간의 이름으로 싸울 때 함께 하여 힘이 되는 하느님이 노동자들이 마련한 집회의 자리에 함께 계셨다. 참여한 노동자 중에 누군가가 투쟁대신 할렐루야를 외쳤다. 이곳이 돈의 질서가 물러나고 인간의 질서로 재편된 곳임에 분명했다.
합창단은 마지막 순서였다, 노동자들의 발언에 이어 모두 세 곡의 노래를 불렀다. 첫 노래는 <영원한 노동자> 였다. 전태일을 추모하는 노래이다. 노래는 자본가의 세상이 억압과 착취로 세상에서 인간을 지운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리고 전태일이 꿈꾸었던 세상, 바로 “눈부신 노동의 나라”를 노래로 꿈꾼다. 노래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노래로 힘을 보태는 일이 된다. 두 번째 노래는 <천리길>이었다. 천리길은 먼길이다. 먼길은 다리를 아프게 하고 걷는 우리들을 힘겹게 한다. 하지만 노래에선 그렇질 않다. 천리길을 노래는 가뿐하게 달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길은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하여 뻗어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노래는 <상록수> 였다. 노래는 “끝내 이기리라”고 했다. 오늘 이곳에서 바꾼 잠깐의 질서가 세상의 질서가 되는 날에 대한 예언이었다.
마련한 곡은 세 곡이었지만 열화와 같은 앵콜 요청으로 인하여 합창단은 한 곡의 노래를 더 불렀다. 앵콜곡은 참가한 노동자들이 모두 함께 불렀다. <해방을 향한 진군>이었다. 노래는 “투쟁의 망치로” 시작된다. 백무산의 시에선 ‘망치’가 “두드려라 그러면 부서질 것이다”는 진리를 발하면서 자본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구이다. 그 세상의 망치로 노래가 세상의 질서를 재편했다.
마지막 앵콜곡을 부르는 동안 옆을 지나던 금발 머리의 외국인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주먹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들과 주먹을 부딪치며 지나갔다. 잠깐 동안 그는 집회의 일원이었다. 지나가면서도 얼마든지 집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집회의 2부는 밥통에서 마련한 연대의 시간이었다. 이 연대의 시간에 노동당에서 갈비를 보냈고, 노동당에선 이 연대를 일컬어 갈비 연대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갈비는 그냥 고기가 아니었다. 갈비는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위해 그 뼈와 살을 노동자에게 주저없이 내준 고귀한 희생이었다. 갈비가 희생의 맛으로 연대하자 소주와 맥주가 갈비가 가는 자리에 우리 또한 빠질 수 없다며 자리를 함께 해주었다. 명동의 길거리에서 집회 참가자들과 합창단은 만찬을 벌였다. 밥통이 마련해준 만찬이었다. 잠깐 동안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사람이 우선인 세상이 이루어진 뜻깊은 자리였으니 그 자리의 만찬은 당연하다. 명동의 길거리를 노동자의 만찬으로 평정하는데는 밥통의 갈비와 소주가 큰 힘이 되었다.
후유증이 좀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너무 감동하여 과음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세상은 과음도 마다할 수 없는 감격적인 세상이었다. 감격의 날에는 조금 지나치게 되는 법이다. 밥통과 이소선합창단이 있어 더욱 좋은 자리였다. 좋은 세상에 먹을 것과 노래는 빼놓을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