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마석모란공원에서 박종철 열사 36주기 추모제에 참가하여 노래 불렀다. 합창단 그날이 함께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박종철이 숨졌을 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그가 죽은 뒤로 그가 살았던 세월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다.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정작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늙지도 못하고 멈춘 22살의 나이이다. 청춘의 나이 그대로 그가 마석의 한 묘지 속에 누워있다. 비가 많이 내렸다.
그의 묘지로 가는 길은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기일에 그를 보겠다고 찾아올 사람들을 위하여 그가 사람들을 맞는 반가운 마음으로 하얗게 채색하여 깔아놓은 마중길일지도 모른다. 비도 그 하얗게 채색된 눈길을 녹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그 눈길을 걸어 그를 찾아왔다. 잠시 이곳이 이승을 버리고 그가 사는 저승이 되고 이제 이곳에서 사람들은 오늘 하루 그를 만난다.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은 함께 그가 무대로 내준 그의 묘지 앞에 섰다. 때로 인원이 우리의 감동이 된다. 무대를 가득 채운 합창단의 인원을 말함이다. 광화문을 가득 메우고 민주를 외치며 별처럼 반짝이던 그 무수한 인원의 촛불에서 우리는 이미 인원의 감동을 맛본 적이 있었다. 합창단도 그 인원만으로 이미 감동이었다.
두 합창단은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음향기기의 도움없이 맨목소리로 했다. 리허설 때 지휘자 임정현은 문익환 목사님도 들으실 수 있게 크게 부르라고 했다. 30분의 차이를 두고 같은 공원의 약간 거리를 둔 곳에서 문익환 목사 추모제도 같이 열리고 있었다. 첫 노래는 <벗이여 해방이 온다>였다. 노래가 흐르자 그가 잠시 “자유의 넋으로 살아”나 또다시 사람들과 함께 “새날 새날을” 연다. 두 번째 노래는 <그날의 오면>이었다. 이 노래는 특히 박종철이 좋아한 노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불렀을 그의 노래가 무대를 가득 메운 두 합창단의 노래가 된다. 이 노래는 나중에 추모제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부른 노래로 다시 반복되었다. 그의 노래가 이제 모두의 노래였다.
인상적인 두 가지 얘기가 있었다. 하나는 박종철의 형이 회고한 동생 박종철이었다. 형은 제삿상을 서른 번 넘게 차렸는데도 동생의 죽음에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형에게서 어린 동생의 죽음은 아무리 그의 기일이 반복되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형도 그런데 그의 부모는 어떠했겠는가. 적응되지 않는 죽음은 그 기일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된다. 그 슬픔 또한 형의 것만은 아니었다. 형이 동생을 회고할 때 형의 슬픔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슬픔이었다.
박종철의 후배라는 사회자의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 선배와 함께 거리 투쟁에 나갔을 때의 기억이었다.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밀려 다시 학교로 쫓겨들어온 뒤에 이렇게 시민들에게 민주를 외칠 짧은 순간도 갖지 못하는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가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후배의 그 회의에 대해 박종철은 때로 우리가 서 있는 오늘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최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은 추모제가 끝난 뒤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전태일의 묘에 들렀다. 전태일 추모제 때마다 합창단이 매년 함께 해 왔으나 지난 해는 찾질 못했다. 두 합창단은 그의 앞에서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전태일 추모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그의 외침이 노래로 울려퍼졌다. 때로 노래가 죽은 이의 무덤 앞에 바치는 꽃이 된다. 꽃이 된 노래가 그의 무덤 앞에 있었다.
문득 두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가 우리가 서 있는 오늘의 자리에서 더이상 물러서지 않고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오늘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