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계영은 자신의 시쓰기에 관한 그의 글 「나란한 우리, 개와 고양이와 여인초와 나」에서 시쓰기를 가리켜 “몸으로 돌아오자”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쓰기에 앞서 나는 이 과정을 생략해 본 일이 없다”고 덧붙인다. 시인의 얘기는 내게 마치 시쓰기가 몸의 느낌을 받아적는 행위라는 말로 들린다. 같은 글에서 시인은 “우리는 현실의 대부분 몸에 기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지낸다는 말인가. 유계영은 “머릿속에서 지낸다”고 답하고 있으며 “생각으로 산다”는 말을 추가하여 이를 강조한다.
시쓰기에 관한 유계영의 얘기는 우리 말로는 잘 구분이 안되는 두 개의 영어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 두 단어는 see와 look이다. 나는 한 사진 강좌에서 이 두 단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때의 사진 강좌는 사진을 잘 찍으려면 필요한 능력이 see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 말로는 보는 능력이다. 그러면서 look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우리 말로는 보는 것이다.
내가 들은 강좌에서는 그 둘을 이렇게 구분해 주었다. 부엌에 놓아둔 자동차 열쇠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뒤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못찾다가 바깥에 나갔다 돌아와선 부엌의 탁자에 놓여있는 자동차 열쇠를 발견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게 여기에 있었는데 내가 왜 못봤지 하게 된다. 이 경우 열쇠를 못찾는 것은 우리가 부엌을 다 뒤지면서 모든 곳을 빠짐없이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열쇠가 있을만한 곳을 미리 단정짓고 머리가 전제하는 곳만 살핀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그것이 look이다. look은 말하자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머리로 보는 경우이다. 정확히는 머리의 편견으로 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see는 그 머리의 편견을 버리고 보이는대로, 말하자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 강좌는 사진을 잘 찍으려면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머리의 선입견으로부터 눈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생각을 갖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사진 강좌는 그와 정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 놈의 생각 때문에 눈앞에 있는데도 못볼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탁자 위에 버젓이 있는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한 것은 알고 보면 열쇠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머리의 지레짐작이 눈을 가로막아서 이다. 때문에 눈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고, 그 뒤에 머리가 눈이 본 것을 느끼도록 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 암암리에 우리가 머리로 보고 있으며, 머리는 많은 편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see와 look을 구별한 사진 강좌의 핵심이었으며, 그 얘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긴 눈이 무슨 편견이 있겠는가. 편견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의 결과이고 생각은 뇌의 작용이다. 눈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나 뇌는 눈이 본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그 선택은 편향적이며 편향은 습관적으로 반복된다. 우리의 눈이 편향되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눈으로 하여금 세상을 편향되게 보게 만든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우리는 머리를 버려야 한다. 일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머리는 없고 눈만 있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때 우리의 눈에는 편견에 물들기 전의 세상이 보인다. 말을 바꾸면 그동안 머리의 편견 때문에 보지 못했던 세상이기도 하다. look이 아니라 see의 세상이다.
자신의 시쓰기에 대한 유계영의 글은 사진 강좌의 이런 내용과 많이 닮아 있다. 유계영에게선 눈으로 보는 것이 몸의 느낌에 비유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시란 생각의 편견에 벗어나 몸의 느낌을 받아 적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몸의 느낌을 받아 적는다는 것이 시를 감각적으로 쓴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을 적는 것이 시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세상을 받아 적는 것으로 구별하여 이해했다. 유계영에서 있어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자신의 시를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으로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의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세상을 마주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으며, 내가 이해한 몸의 느낌이란 감각적이라기보다 몸으로 세상을 겪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로 여겨졌다.
시가 몸으로 겪은 세상을 받아 적은 것이라면 가장 이상적으로 보자면 시를 읽는다는 것 또한 시인이 겪은 세상을 다시 겪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읽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른 것일까. 당연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의 글에 곁들여진 시 한편을 읽지 않고 겪는 방식으로 읽어 보기로 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피정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나의 집이 온데간데없어서
낙엽 더미를 끌어모아
덮고 잤어요
잎사귀 끝이 뾰족하여서
빈틈의 끝도 뾰족했어요
나는 밤새 찔려 이슬
이슬 앓아야 했어요
대합실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간판과 지붕이
새처럼 날아가고 개와 돼지들이
국경을 넘고
—유계영, 「태풍 클럽」 부분
나는 시의 이 부분에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합실 텔레비젼에서” 본 뉴스 속에서 “간판과 지붕이/새처럼 날아가고 개와 돼지들이/국경을 넘”어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을 본 것이 사실이고 “나의 집이 온데간데없어서/낙엽 더미를 끌어모아/덮고 잤”다는 부분은 허구로 보인다. 왜 이런 허구가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뉴스 속의 태풍을 시인이 보는데 그치지 않고 몸의 느낌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잎사귀 끝이 뾰족하여서/빈틈의 끝도 뾰족했”고 그 때문에 “밤새 찔려 이슬/이슬 앓아야 했”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겪은 감각처럼 보이는 경험도 몸으로 겪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시인은 태풍 뉴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태풍을 겪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시 속에서 사실과 허구가 뒤섞이고, 허구도 사실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잎사귀 한 장이
나무의 몸서리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을 봤어요
끝에서 끝으로
불씨가 옮겨붙듯이
잎사귀 한 장이
나무를 지탱하는 것을요
—유계영, 「태풍 클럽」 부분
눈으로 볼 때와 달리 몸으로 겪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가 더욱 밀착된다. 밀착된 거리는 본다는 행위에 따르는 거리나 방향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말하자면 겪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나무가 ‘몸서리’를 칠 정도의 엄청난 태풍이었지만 그 태풍에도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있는 “잎사귀 한 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 “잎사귀 한 장”을 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 것이 태풍에 집이 없어져 낙엽 더미를 끌어모아 덮고 자야했던 허구적 경험, 말을 바꾸면 몸의 겪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의 겪음을 통해 세상이 뒤집힌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 속에선 나무가 태풍을 지탱하지 잎사귀가 태풍 속에서 나무를 지탱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몸의 겪음을 통해 태풍을 가장 힘들게 겪는 것이 나무가 아니라 나뭇잎이라는 사실에 이른다. 나무는 물리적으로 나뭇잎보다 훨씬 굳건하다. 나뭇잎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미약한 나뭇잎이 겪는 태풍이 훨씬 힘겨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거대한 태풍을 잎사귀가 끝내 이겨낸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잎사귀의 힘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급기야는 그 힘이 세상을 뒤집어 잎사귀가 나무를 지탱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힘들게 세상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작고 힘없는 자들이 많다. 잎사귀는 그들과 겹쳐진다. 시는 세상을 과연 누가 지탱하고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그 잎사귀가 시인의 눈에 불씨로 보였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뭇잎은 불꽃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불씨는 두 가지로 번질 수 있다. 불꽃은 어둠을 밝히는 단초가 되기도 하지만 세상을 불태우기도 한다. 불씨로 보인 나뭇잎이 그 둘 중 어느 쪽으로 번져나갈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맑은 물을 띄우려면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하고 춤이 오려면
고통을 흔들어야 하지요
내가 가장 빨리 비를 봤어요
나의 집이 온데간데없길래
낙엽을 모았어요
귓바퀴에 엉겅퀴
풀씨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잠들었어요
—유계영, 「태풍 클럽」 부분
시인은 주에서 시의 제목이 “소마이 신지의 영화 <태풍 클럽>(1985)에서” 온 것임을 밝혀놓고 있다. 시인이 언급한 영화를 보는 것은 시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몸소 겪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면 태풍 속에 학교에 고립된 아이들이 불안을 이기려고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춤이 오려면/고통을 흔들어야 하지요”라는 시의 구절은 이 영화에서 온 것으로 짐작된다. 춤은 일반적 인식 속에선 즐거울 때 흔드는 몸짓이다. 그러나 몸으로 겪은 태풍은 “고통을 흔들” 때 춤이 올 수 있다는 알려준다. 다시 말하여 춤은 즐거울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영화 속에서 아이들의 춤추는 장면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몸으로 겪는다. 몸으로 겪으면 언어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즐거워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흔들어 춤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흙탕물이 가라앉” 은 다음에 떠오르는 ‘맑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가장 빨리 비를 봤어요”라는 구절은 영화 속 대사이다. 시인은 그 대사를 고스란히 가져오고 있다. 나는 “가장 빨리 비를 봤”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가 아니라 세상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비를 봤다는 말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나는 비를 본 것이 아니라 비를 겪었다는 말로 이해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겪은 태풍이다.
타오르는 나무를 둘러싸고
바비큐를 기다리는 사람들
춤추고 있어요
그때 당신이 날 들어 올렸나요?
우리 집 마당에 웬 동물이야?
그렇게 말했나요?
—유계영, 「태풍 클럽」 이상 전문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난해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사실과 허구에 이은 세상의 현실로 파악했다. 그 현실 속에서 시인은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세상을 몸으로 겪는다. 사람들이 바비큐를 구워 먹으며 춤을 추는 세상이다. 이 사람들은 태풍을 겪으며 “고통을 흔들”어 춤을 부르던 사람들이 아니다. 아마도 태풍을 전혀 위험으로 겪지 않는 가진 자들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누군가는 태풍을 힘들게 겪지만 또 누군가는 태풍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태풍 앞에 집이 없어지고 잎사귀를 덮고 바깥에서 잠을 자게 된 사람들이 거의 동물로 비친다. 시는 세상에 태풍을 둘러싸고 그런 시각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시선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집 마당에 웬 동물이야?/그렇게 말했나요?”라는 마지막 구절은 바로 그 이의 제기이다.
몸으로 겪으면 태풍이 달라진다. 집이 무너질 정도의 태풍이 왔을 때 대개의 눈에 그 태풍을 이겨내는 것은 나무이다. 하지만 몸으로 겪은 태풍 속에선 잎사귀가 나무를 지탱하는 것으로 시각이 뒤집힌다. 그러나 그 태풍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에선 태풍을 겪은 사람들이 행색이 초췌하다는 이유 하나로 동물로 보일 수 있다. 직접 겪지 않더라도, 시쓰기라는 행위 아래 태풍을 몸으로 겪고, 또 시읽기라는 행위 아래 태풍을 몸으로 겪으며 세상 또한 겪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을 동물로 보는 시각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태풍을 겪지 않음으로써 가질 수 있는 세상의 편향된 시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과연 누가 동물인가를 묻는 것이 시인이다. 몸으로 겪고 쓸 때 그러한 시가 나오며, 몸으로 겪으며 읽을 때 시는 그렇게 읽힌다.
(2023년 3월 6일)
(인용한 유계영의 글과 시는 유계영 외,『영원과 하루』, 타이피스트, 2023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