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3년 5월 10일 수요일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추모 문화제에 함께 했다. 소식은 한 노동자가 건설노조에 대한 검찰의 부당한 탄압에 항거하여 분신했다고 전했다. 분신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말이 그의 죽음을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분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불이 된 것이었다. 그는 몸에 불을 붙여 죽음으로 항거한 것이 아니라 그냥 불이 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는 뜻이다.
불이 되고자 한 그의 마음이 가장 먼저 하고자 했을 일은 검찰이 그의 삶에 새기려고 한 공갈이란 부당한 혐의를 태워없애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부당함은 억울함을 낳고 그 억울함은 분노를 불러오며 그 분노는 누군가가 불이 되어 그 부당한 혐의를 태워없애려 들게 만든다.
문화제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이소선합창단이 리허설을 하는 동안 서쪽 하늘에 저녁해가 걸려 있었다. 알고보면 우리의 빛인 태양은 거대한 불덩어리이다. 검찰 정권의 부당한 탄압으로 노조 활동이 억압받는 시대는 암흑의 어두운 시절이다. 우리에게 길을 밝혀줄 빛이 필요한 시대이기도 하다. 불이 되려 결심했을 때 그가 빛의 필요를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그는 불이 되어 이 어둔 노조 탄압의 시기에 세상 노동자의 빛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해는 곧 졌다. 하지만 문화제에 모인 모든 노동자들이 촛불을 들었다. 불이 불러온 빛이었다. 불은 해가 져도 불을 불러모아 빛을 만들고 수많은 빛으로 길을 연다.
이소선합창단은 모두 세 곡의 노래를 불렀다. 첫곡은 합창단의 소프라노 최선이가 홀로 불렀다. 최선이가 부른 노래는 <벗이여 해방이 온다> 였다. 노래는 “그날은 오리라”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자유의 넋으로 살아”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날이다. 그날이 어떻게 오는가.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온다. 노래는 사람들이 그의 뒤를 이어 싸울 때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새날을 여는” 그날이 온다고 했다. 합창단의 첫 노래는 노동자 양회동이 불이 되어 열려 했던 새날과 그 날이 어떻게 오는가를 말했다.
합창단이 부른 두 번째 노래는 <동지를 위하여> 였다. 합창단의 모두가 입을 모아 부른 노래는 동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머물 수 없는 그리움으로 살아오는 동지여”라고 노래할 때 그리움이 마중 나가 그 그리움으로 살려낸 동지를 마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세상 모든 것이 “살아오는 동지의 새 여명의 눈빛”이 된다고 말한다. 집회 장소는 어둠에 잠겼지만 세상은 초록이 한껏 짙어진 나무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생명감이 가장 극에 오르는 시절이었다. 그 생명감이 나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는 <상록수>였다. 노래는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고 한다. 소나무는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푸르다. 하지만 양회동 열사를 추모하는 자리의 시간은 오월이었다. 오월은 솔잎만이 아니라 모든 나무의 잎이 한껏 푸르러진 시절이다. 세상의 모든 나무가 솔잎을 쫓아 초록의 나무가 된다. 세상의 나무가 모두 초록이 되어 솔잎과 함께 하는 시절이었다.
죽음은 사람을 조심스럽게 한다. 스스로 불이 된 죽음은 더더욱 그렇다. 집회와 그 집회에 함께 한 합창단의 노래를 기록하고 전하는 내 말이 죽음에 대한 찬사로 비쳐 죽음을 부추기는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바라보면 그날의 노래는 불이 되려한 한 삶이 더 이상 없어도 되는 세상을 위하여 그의 삶과 함께 하며 그를 다시 살려내려 산자들이 모은 마음이다. 그가 살아나는 자리에 더 이상 불이 되는 삶은 없다. 그와 노래가 모두 꿈꾸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