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 있는 자리에 갔다. 아들의 이름은 임정현이었고, 아버지는 임기윤 목사였다. 2023년 5월 11일,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에서 있었던 순교자 임기윤 목사 국가배상 추진 기자회견 자리였다.
민주 세상이란 이름 아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 가령 집회와 시위의 자유와 같은 것이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음을 알고 있다. 또 그런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참사에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그 책임을 물어 희생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권리도 민주화된 세상에서나 가능함을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깨닫고 있다. 내 가까이에도 그런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임정현의 아내인 김미숙이 그랬다. 세상의 삐뚤어진 시선과 무책임한 정부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상처를 더 크게 덧내고 있을 때 항상 그 아픔을 위로하는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그녀를 여러 차례 보았다. 올해의 세월호 참사 추모 행사에선 희생자의 가족들이 그녀를 자신들이 앉아 있는 가족석으로 불렀다. 아픔을 위로하던 그녀는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또하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녀를 알고 나서 그녀의 남편을 알게 되었다. 남편의 이름은 임정현이었다. 처음 알았을 때 테너였던 그는 곧 이소선합창단의 지휘자로 그 정체가 바뀌더니 그 합창단은 노동자와 함께 하는 합창단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사진가로 그 합창단과 함께 하게 되었다. 내게 임정현은 이제 노래로 일하던 자리에서 쫓겨난 노동자와 함께 하며 그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일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었다. 아내에 이어 남편도 민주 세상을 위해 그의 삶을 바쳐가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아내의 이름으로 그녀의 남편에게 가 닿았던 나는 이번에는 아들의 이름으로 그의 아버지에 가 닿았다. 오래 전에 세상 뜨신 그의 아버지는 광주의 5.18 민주묘역에 묻혀계셨다. 이미 그것만으로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폭압적 통치로 이 세상을 짓밟고 있던 1980년 7월에 보안사에 불려가 조사를 받다 사흘만에 사망했다.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의심되는 정황이었지만 보안사에선 병사로 그 죽음을 덮었다. 보안사에서 덧씌운 병사라는 억울함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의문사로 정정한 것은 2000년이었다. 하지만 가족에게선 그의 죽음이 의문사가 아니었다. 순교자 임기윤 목사의 죽음은 보안사의 가혹 행위로 인한 고문치사였다. 두개골에 남아 있는 상처가 그 증거였다.
아버지를 알고 있고 민주 세상의 소중함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 누리고 있는 세상이 그에게 빚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기자회견 자리는 그 부채의식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은 그 자리에서 있었던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가장을 잃는다는 것은 한 가족이 균형을 잃는 일”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느닷없는 억울한 죽음이 한 가정에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
아마도 아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꿈꾸던 세상이 왔다면 이런 배상을 청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겐 가장 큰 배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 들어와 인권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이 정권에선 노조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 노동자를 분신으로 내 몰고 있다. 인권의 퇴보이다. 아들은 인권이 뒷걸음질치는 세상이 되자 아버지의 이름을 다시 세워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싸우려 한다. 자신들의 정권에 반대한다고 하여 사람을 데려다 고문으로 죽이는 정권이나 부당한 혐의를 덧씌워 분신으로 내모는 정권은 모두 인권의 차원에서 똑같은 정권이다. 다만 지금은 법으로 위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인권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며 전진할 때 아버지는 죽음 속에서 영면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 속에서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배상추진 위원회에서 유가족을 설득하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이 싸움이 쉽지 않은 싸움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은 끝내 이 싸움에 나서 주었다. 배상추진위원회에선 그런 가족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나도 그 감사에 내 마음을 얹었다. 이 싸움에서 아들이 꼭 이겨 5.18 묘역으로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아버지의 편안한 잠을 보고 돌아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또다른 인권의 진보로 기록될 때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 우리는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 있을 것이다.
그의 아내를 알게 되어 참사의 희생자를 위로하며 그들의 또다른 가족이 됨으로써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은 나의 큰 행운이다. 그 행운은 노동자 합창단의 지휘자로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더 나은 민주 세상을 향해 걸어나는 그의 남편을 만나는 또다른 행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 남편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앞세우고 퇴보하는 인권의 시절에 맞서 또다른 싸움에 나선다. 내가 또 빚을 진다.
기자회견의 마지막 순서는 모두가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죽음이 다시 살아나 산자들을 이끌고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행진하고 있었다. 임정현도 주먹을 불끈 쥐고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식전에 가졌던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임정현은 중학생이었던 부마항쟁 시절 거리로 시위를 나갔던 자신을 찾으러 나오셨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깨를 도닥여주었고 도닥여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를 도닥이며 또 함께 해주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