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을 오르며

강원도는 온통 산이다.
마을은 그 산의 중턱에 있거나
아니면 산의 아래 자락으로 낮게 몸을 맡기고 있다.
때문에 강원도에선 산에 오르지 않는한 시선이 멀리 갈 수가 없다.
항상 산이 그 시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강원도에서 20여년을 자랐다.
영월 읍내로부터 40리 가량 떨어진 산골 마을이었다.
이번에 함께 태백산을 갔던 서울 사람들은
내가 자란 그 첩첩산중을 지나면서
“야, 이런 곳에서 서울을 왔으니 크게 출세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면 산부터 보이는 곳에서 자란 나에게
사실 산은 오르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자랄 때
나에게 있어 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냥 산을 걷는다였다.
그러니까 나는 산을 올라다닌 것이 아니라
산을 걸어다녔던 셈이다.
그 둘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갖고 있다.
산을 오를 때는 정상을 염두에 두고
산의 꼭대기까지 가는데 초점을 맞춘다.
산을 걸어다닐 때는
그냥 산을 돌아다니는 것이며,
그때의 시선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마치 평지처럼 산길을 간다.
그리고 그 걸음의 와중에서 많은 것들을 만난다.
바람을 만나고, 나무를 만나며, 햇볕을 만난다.
나는 유독히 산길을 따라 이리저리 산을 돌아다니며 시간보내는 것을 좋아했었다.
알고보면 내가 좋아했던 것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길에서 부딪치는 그 많은 만남이 아니었던가 싶다.
2월 4일, 태백산을 오를 때,
나는 태백산을 오르기 보다 예전처럼 산을 걸으며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만나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밭은 원래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평탄하다.
산비탈에 있어도 밭은 아래로 흘러내리는 법이 없다.
그러나 농부가 그 밭에 이랑을 내면
그때부터 밭엔 물결이 일렁인다.
오늘은 그 밭에 눈이 덮였다.
황토빛 물결이 오늘은 흰빛 물결이 되었다.
나는 발목까지 빠지는 밭에 들어가
물결 위를 걸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는 키가 작을 때는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지만
키가 크게 자라면
그때부터 하늘을 콕콕 찌른다.

Photo by Kim Dong Won

입에 올리긴 쉽지만
천년이란 세월은 사실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오늘 이 태백산 주목의 아래쪽을 지나간 사람들은
그가 지켜가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세월 속에
아득한 흔적 하나를 남기고 가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르는 산길은
태백산 주목이 지켜온 아득한 천년 세월의 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몸을 꼿꼿이 세우고 키를 키운 나무는
하늘을 찌르지만
구불구불 바람에 흔들리며
자라난 나무는 키가 자라도
하늘을 찌르지 않는다.
그냥 날 좋은 날
더듬더듬 푸른 하늘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칠 뿐이다.

Photo by Kim Dong Won

가끔 사람들이 없을 때면
나무를 안아보고 싶다.
나무가 옆으로 펼쳐든 가지가
나의 포옹을 기다리는 나무의 반가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내 고향의 작은 뒷산이나 앞산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높은 산에 오르니
저 아래 내가 올려다보던 산들이
큰 산 아래 올망졸망 모여살고 있다.
큰 산 아래 작은 산들이 모여살고,
작은 산 아래
마을이 모여 산다.
산아래 모여사는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그 느낌이 따뜻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아아, 마이크 시험중.
안녕하세요, 태백산의 온갖 나무, 새, 바람, 동물 여러분!
태백산 이장 천년 주목입니다.
오늘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희 산을 찾아왔습니다.
부디 반갑게 맞아주시고,
외지분들이 등산로 아닌 곳에 들어가지 말고
쓰레기 버리지 않도록 잘 지도해 주세요.”
이장님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바람을 타고
태백산 산길에 울려퍼질 듯한 느낌이다.

Photo by Kim Dong Won

호리호리한 몸매로 허리 한번 비트니
그 자태가 너무 선정적이다.
사람들 눈치보며 몰래 훔쳐 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주목은 그 이름은 붉지만
가지 끝의 나뭇잎엔 푸른 색이 산다.
눈이 내리면 그 푸른 색이나 붉은 색 위에
잠시 흰색이 거처하다 간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늘 유난히 하늘이 파랐다.
주목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얘기는
살아있을 때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죽어선 푸른 하늘로 목을 축이기에 가능한 얘기이리라.
그러고 보면 주목의 죽어 천년은
푸르고 시린 이 나라의 하늘이 이끌어준
또 다른 삶인 셈이다.
주목의 옆에서 한참 동안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슴의 갈증이 크게 가시었다.

8 thoughts on “태백산을 오르며

  1. 2월인데도 전 아직 이러고 있네요~
    사진찍으실 저 곳에서 불어왔을 날카로운 찬바람이 오늘은 부러워지네요. 시원하게 볼을 때리는 그 느낌~

    1. 여행은 떠나는 자의 몫이라는데 한번 무작정 떠나보지 그래요.
      하긴 여행떠나기엔 좀 애매모호한 계절이예요.
      내 경험에 의하면 여행은 5월경이 좋더라구요.
      그리고 가을엔 10월이 좋구요.
      제일 안좋은 때가 겨울이예요.
      좀 참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고.

  2. 지금 저희 사무실 창밖엔 눈이 조금씩 뿌리기 시작하는데,
    때맞춰 좋은 글과 사진 구경했습니다.
    밑에서 두 번째 사진은 정말 연출을 잘하셨네요.^^,
    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눈 살짝 덮인 가지가 보기 좋네요.

  3. 어제 그제 내린 눈으로 태백이 더욱 太白이 되었겠구려…
    몇년전 울 딸 데리고 갔을 때의 태백은 푸근하여 좋았고
    이번 태백은 칼바람 맞으며 좋은 사람들과 동행한 것이 좋았소.
    더구나 마지막 곤드래나물밥은 정말 맛있었다우.

    고향이 저렇게 시퍼렇게^^ 버티고 있는 당신이 부럽기도 하오.
    푸른 하늘이 바로 어제처럼 그립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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