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익이 왔다. 아는 여자가 보내준 것이다. 연락이 온 것은 지난 주 금요일이었다. 여자는 톡은 안하냐고 물었고, 그 톡은 카카오톡이었다. 하긴 하는데 잘 들여다 보진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럼 지금 한 번 들여다 보라고 했다. 내가 톡, 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열었을 때 그녀의 말 속에 든 것은 케익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그녀가 보내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리고 그 케익은 주일을 바꿔 화요일 오전에 내게 도착했다. 그러나 자유는 잠시 냉동실에 냉동되어 있어야 했다. 화요일의 외출에서 돌아온 내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하룻밤을 넘긴 탓이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내 앞에서 나와 마주했다.
나는 또다른 무수한 케익을 기억하고 있다. 케익은 내게 오랫동안 홀로 마주할 경우가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나는 케익을 사이에 두고 항상 둘이 마주 앉았다. 둘의 사이에 자리한 케익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것은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케익의 달콤함은 사랑의 맛을 대변한다. 불행히도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케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의 형식이 된다. 사랑의 형식이 되면 사랑은 지워지고 케익만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케익에 여전히 사랑이 있다고 믿으며 없는 사랑을 둘 사이에 마련되는 케익에 의존한다. 처음에는 사랑이 케익을 가져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케익이 사랑을 담보한다. 우리는 그 담보 속에 사랑이 파탄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끈기있고 참을성있게 케익의 담보에 의존한다. 나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아는 여자가 보낸 케익이 왔다. 여자는 케익만 달랑 보냈다. 생전 처음 홀로 마주하는 케익이다. 치즈 케익이어서 맥주랑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냉장고 쪽에서 아우성이 들린다. 냉장고를 여니 차곡하게 져며놓은 맥주캔들이 일제히 손을 내민다. 내가 처음 손을 잡은 것은 호가든이었다. 그러나 나는 냉장고문을 몇 번 더 열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케익이 맥주를 부르지만 그 다음에는 맥주가 맥주를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호가든은 호가든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냉장고문을 열었을 때 내 손을 잡아준 것은 산미구엘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지 않고도 벨기에와 필리핀에 취하는 순간이 내게 주어지는 신비가 그 두 캔에 있다.
케익을 마주하기까지 긴 시간이 있었다. 케익을 보낸다는 연락이 왔던 금요일엔 거처의 베란다에서 지는 저녁을 봤던 기억이 있다. 지는 해를 서쪽에서 거두어들이는 저녁이 아니었다. 고층 아파트의 위쪽으로 환하게 남아있는 저녁이었다. 저녁은 저녁해의 기울어진 빛으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층을 다 채운 뒤 허공으로 사라지며 오는 것이었다. 아파트는 내가 사는 곳에선 동남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만 동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저녁도 저녁을 동쪽에서 마무리한다.
토요일엔 동네를 산책했다. 의외로 나리꽃이 자주 눈에 띄었다. 원추리와 시기를 비슷하게 맞추며 피는 꽃이지만 꽃이 피는 장소는 다르다. 원추리가 동네의 꽃이라면 나리꽃은 산의 꽃이다. 그러니 나리꽃을 보려면 산에 가야 한다. 하지만 동네에도 나리꽃이 여럿 있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20년을 살다 서울로 와서 이제는 고향에서 살던 시절보다 더 오랜 시절을 대도시 서울에서 뭉개고 있는 내 인생과 비슷한 인생이 꽃에게도 있다. 은근히 더워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선 샤워를 했다. 땀의 끈적임을 씻어낸 몸은 느낌이 좋았다.
일요일 아침에는 이른 시간에 비가 내렸다. 소리는 빗줄기의 굵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엄지손가락 만큼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그랬다. 빗소리는 박수소리와 비슷했다. 환호와 축하의 소리로 바깥이 가득했다. 기립박수가 아니라 세상에 내리꽂는 독특한 박수였다. 그 박수와 환호의 시간은 짧았다. 비는 곧 그쳤고 그 뒤로는 여름을 환기시키려 작정한 듯 뜨거운 열기가 온도를 높여갔다. 저녁에 잠시 에어컨을 틀어야 했다.
월요일엔 집에서 연락이 왔다. 딸이 에어컨을 새로 샀다며 설치를 하는 동안 집에 켜놓은 내 컴퓨터의 접속이 끊길 것이라고 했다. 딸이 언질을 준 시간은 오후 네 시였지만 접속이 복구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 밤 9시 넘어까지 기다려야 했다. 동남쪽 아파트에 걸린 저녁빛이 이틀전에 비해 더욱 강렬해져 있던 날이었다.
그 모든 날들의 기억을 거쳐 화요일에 케익이 왔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케익을 열고 맛을 본 것이 아니라 냉동실에 케익을 맡겨놓고 천호동 집에 다녀온 것이었다. 집에 켜놓고 세상의 어디에 가나 접속하며 살 수 있도록 해놓은 컴퓨터에 약간의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컴퓨터에 연결된 외장 장치 중에 선더볼트로 연결된 두 개의 저장장치가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시작된 날이었지만 내가 방화의 거처를 나선 것은 빗줄기가 잠시 가진 휴지기의 순간이었다. 천호동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에 들러 컴퓨터를 살펴봤고 집에 와 있는 시집들을 정리했다.
천호동에서 방화로 오는 5호선은 마치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것만큼이나 오래고 길다. 나는 용케 타자마자 자리를 구했으나 그 자리에 앉아 내 옆의 동행을 수시로 갈아치워야 했다. 내 자리의 모든 동행을 갈아치우고 난 끝에 방화가 다음역이 되었을 때 내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끈기있고 참을성있게 그 자리를 버텼다. 그리고 결국은 혼자가 되어 방화에 도착했다. 방화는 내게 무슨 상징 같은 곳이다. 지하철이 이곳이 종착역임을 알리며 도착할 때 대부분의 경우 자리에 나밖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혼자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열차는 방화에 도착한다. 거처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잤다.
이제 수요일이다. 케익을 꺼내고 케익이 부른 맥주를 불러 한 잔한다. 아침부터 무슨 맥주냐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케익이 자유이기 때문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자유의 케익은 시때와 상관없이 맥주를 부를 수 있다. 케익이 속삭인다. 형식을 지키다 파탄난 사랑을 두려워하지마. 그 사랑은 이제 버려. 그러면 잃은 사랑의 자리를 자유가 채우게 될 거야. 이 아침에 그 자유가 달콤하다. 그녀가 보낸 것이다.
(2023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