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계영의 시 「인그로운」에서 한 구절을 들여다 본다.
못 본 척하고 돌아누워 있다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 소리
—유계영, 「인그로운」
나는 이를 누군가가 텔레비젼을 켜놓은 채 보질 않고 돌아누워 있는 상황으로 이해했다. “건넛방의 혼자가 잠든다는 사실만으로/안도감을 느끼던 시절의 일들”이라는 구절로 미루어 그 누군가는 아마도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자고 있는 중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말하자면 이 상황 속에는 돌아누워 자고 있는 사람과 홀로 돌아가고 있는 텔레비전이 있다. 그런데 시의 구절은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을 지우고 텔레비전만 남겨놓는다. 그 때문에 시의 구절은 마치 텔레비전이 “못 본 척하고 돌아누워 있다”가 “혼자” 떠들면서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한 구조가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이 상황 속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은 지워지고 그 사람이 처한 상태가 텔레비전에 흡수되어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그럴 수는 없으므로 지워진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으면 구절이 아주 난해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구절이 나오게 된 것일까. 나는 그것을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이런 구절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충분히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살다보면 우리에겐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사람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죽여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언어로 사람을 지워버릴 수 있다. 이 구절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준다. 때문에 나는 이 구절 속에는 어떤 사람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그가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그 짐작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가령 시인은 “더 오지 말고 거기에서/더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던져”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것도 싫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자와 같이 살고 있다면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그 심정은 “끈적이는 발자국을 남기고 야반도주할 거야”라는 구절에 담겨 있다. 끈적이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귀찮은 청소거리를 남기는 소심한 복수로 추정된다. “도주로에 벗어놓게 될 다디단 바지들과” 그 바지로 인하여 “개미가 들끓는 미래” 또한 나는 소심한 복수로 추정했다. 왜 하필 바지일까. 그건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지워버리고 싶고 멀리 도망치고 싶은 그 사람은 아울러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그 짐작은 “고약한 일/옛날 사람의 발상으로 오늘이 환해지는 건”에서 왔다. 평이하게 순서를 잡자면 옛날 사람의 발상으로 오늘이 환해지는 건 고약한 일이다가 된다. 나는 그것을 나이든 사람이 자신들의 경험을 내세워 젊은 사람에게 하는 훈계질로 이해했다. 이른바 꼰대질이라고 부르는 행위이다. 시인은 그것을 고약한 일이라 칭한다. 이제 지워버리고 싶고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고약한 습성 하나가 더 보태진다.
나는 불행히도 시인이 이 상황에서 도망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았을까. 가끔 자살을 생각하고 그때마다 꽃을 사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삶은 길고 지루한데 축하는 너무도 짧아서/누군가 꽃다발을 발명했다고 전해진다/죽음을 예감하는 순간이 컴컴하지 않도록”이란 구절에서 내가 받은 인상이 그렇다. 또 세계지도를 보면서 여행을 꿈꾸고 그때마다 헤프게 웃으면서 삶을 견뎠다고 생각한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대륙의 윤곽만 따라가는 눈동자처럼/웃을 수 있을 것이다/접힌 지도 속에서 대륙이 등분될 때마다/헤퍼지는 웃음”에서 그렇게 짐작했다.
시인이라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때로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과 지루하고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삶이 시인의 삶이 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사람을 지울 수는 없다. 그때 시인은 시의 힘을 빌려 그 사람을 지우고 텔레비전만 남긴다. 죽고 싶을 때는 꽃을 사고 꽃을 이제 드디어 삶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된 죽음에 대한 축하로 삼아 그 순간을 환하게 밝히는 것으로 삶을 견딘다. 도망을 치고 싶어도 도망을 칠 수 없는 현실은 지도를 펼쳐놓고 “접힌 지도 속에서 대륙이 등분될 때” 대륙에서 대륙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여행지를 웃음으로 삼아 그 삶을 견딘다.
시의 제목은 「인그로운」은 살을 파고든다는 뜻이다. 정상적으로는 살을 뚫고 나와 바깥으로 성장을 해야 하는데 성장의 방향이 반대가 되는 경우이다. 가령 털이 살을 뚫고 나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살 속에서 자라면 인그로운 헤어가 된다. 그렇게 매몰된 털처럼 자라는 삶이 있다. 이 시는 그런 삶에 관한 얘기인 셈이다.
시는 때로 엄청나다. 삶이 안으로 매몰될 때, 그러한 삶을 가져오는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지우고 도망칠 수 없는 삶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해준다. 꽃을 사는 것으로 꽃의 축하 속에 잠시 죽을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죽으면서 산다.
(2023년 7월 31일)
(인용한 시는 유계영 시집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문학, 2018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