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다녀왔다. 고향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9월 2일에 모였다. 갈 때는 강변역의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강남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도 영월가는 버스가 있나 보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음에는 그걸 타볼 생각이다. 방화에 거처를 둔 뒤로는 강남 터미널이 더 가깝다. 하지만 거리가 반드시 거리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친숙하기로는 동서울이 훨씬 더 가깝다.
고향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고향가는 길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 대개는 중부를 타고 이천에 가서 영동으로 바꿔타고 원주가서 중앙으로 바꿔타는 식으로 고향엘 간다. 이번에는 아주 이상하게 갔다. 버스가 한남대교까지 가서 경부를 타더니 영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아주 오래 전에 중부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 다녔던 길이다. 모두 주말의 막히는 길과 버스 전용차로 때문인 듯하다. 주말에는 중부고속도로가 어지간히도 막히나 보다. 이천부터는 옛날부터 다니던 길이었다. 이천까지 바람 같이 가더니 그곳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버스가 경부로 간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10시 버스를 타고 가 12시반쯤 도착했다. 친구 기탁이가 나와 주었다. 국수집 좋은데 있다며 데려갔다. 붐비는 시간에는 줄서는 집이라고 했다. 국수에 동강 막걸리 한잔 했다. 늦게 들어온 옆자리의 국수가 먼저 나왔다. 두 번 쳐다 봤더니 강원도 사투리가 분명한 억양으로 자신들은 전화해서 온다고 미리 예약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먼저 왔는데 하는 소리가 내 눈빛에서 묻어났나 보다. 아, 그런 거군요 했다.
점심 먹고 기탁이와 함께 금강정을 잠시 걸었다. 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정자가 있는 곳이다. 예전에 영월방송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나는 영월에서도 이곳을 상당히 좋아해서 자주 찾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거의 가보질 않았다. 어디를 가나 산책하기 좋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기탁이의 설명을 들으며 걸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내 고향을 고향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것이 좋을 정도로 내가 오래 외지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된다.
오후 3시쯤 영월관광센터에서 모였다. 잘 지어진 건물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놀러온 가족들이 많았다. 영월 소개하는 초대형 영화 한편 본 뒤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가 청령포를 걸었다. 혼자 와서 호젓한 시간을 가져도 좋겠구나 싶었다. 친구들따라 전망대까지 올랐다가 체력이 방전되어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술을 마시지 못했다. 천천히 걸으면 그 정도는 아닌데 친구들 걸음을 따라 걸은 것이 화근이었다. 밤에 숙소에 가서 일찍 자리에 누워야 했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생하며 살아온 얘기는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은 영월역 앞의 성호식당에서 다슬기해장국으로 속 풀었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질 않아 풀 속도 없었다. 영월가면 성호식당은 빼놓질 않고 들르게 되는 듯하다. 근처에 다른 식당도 많지만 항상 이 식당만 바글바글이다. 붐비는 시간에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겐 다슬기란 이름이 낯설다. 우리는 다슬기가 아니라 골뱅이라고 부르며 자랐다.
아침 해장하고 장릉 곁에 있는 물무리골의 걷기길을 걸었다. 평지였지만 친구들 걸음을 따라가다 체력이 바닥났던 어제가 기억나 친구들을 따라가진 않았다. 친구들이 그곳의 길을 다 걷는 동안 나는 반만 걸었다. 예전에 습지라서 잘 가지 않던 곳이었지만 나무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걷기에 아주 좋았고 거의 평지라서 나같은 사람에게도 무리가 없었다.
숲길을 걸은 다음에는 간만에 보덕사에 들렀다. 영월하면 가장 유명한 절은 법흥사이지만 영월 태생인 우리에게 법흥사는 영월이 아니라 주천에 있는 절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 영월에 있는 절은 보덕사이다. 나는 법흥사보다 보덕사가 좋았다. 어릴 때 봤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영월 읍내에서 가까운 거리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의 연못에 아직도 연꽃이 남아 있었다. 빛이 상당히 고왔다. 절의 입구에 있는 찻집에서 음료 한잔씩들 마셨다. 영월이 너무 편리하고 좋아졌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보덕사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다. 남은 시간은 친구 기탁이가 책임져 주었다. 보덕사 바로 곁에 금몽암이 있다며 사실 그곳이 좋다고 가보자고 했다. 금몽암이라니. 금지된 꿈을 꾸는 암자이다. 세상의 금지를 모두 금지하는 꿈이 그 암자에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영월에 이런 보석 같은 곳이 있나 싶은 암자였다. 암자의 마루에 누으니 처마의 경계를 따라 구름 좋은 하늘이 담겨 있다. 기탁이도 알고 나도 아는 고향 형의 형수가 절에서 일하고 있어 차를 한잔 얻어 마셨다. 포도도 곁들여 주었다. 기탁이가 비오는 날 와서 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어떤 시름도 그 빗물이 모두 씻어간다고 말해주었다.
기탁이가 봉래산에 올라가 보자고 했다. 봉래산 꼭대기에는 별마로천문대가 있다. 차로 올라갈 수 있다. 두어 번 가봤다. 한번은 주말에 올라가다 하도 차가 밀려 아주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주말인데도 내려오는 차를 몇 대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영월 인기가 시들해 졌구나 싶기도 했다. 기탁이가 옛날 한창 인기높을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영월에는 더 좋기도 하다고 했다. 하긴 사람 밀려들면 대개는 자연이 다 망가진다.
팔만 펼치면 날아오를 것 같을 정도로 구름이 좋았다. 한참 동안 구름을 눈에 담았다. 패러글라이딩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해서 그 풍경도 보려했으나 타는 사람이 없었다. 내려오고 나니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더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려오다 중간에 있는 숲속의 쉼터에서 쉬었다. 하루 종일 그곳의 나무들이 짙게 내려놓은 그늘 속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싶었다.
내려와선 영월역 앞에서 기탁이와 헤어졌다. 올라가는 교통편은 기차표를 끊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영월역 앞의 동강변을 걸었다. 이렇게 구름 좋은 날을 만나기도 쉽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구름이 좋았다.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강의 물이 많이 불어난 것도 풍경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오후 두시반 기차였다. 간만에 타는 기차였다. 청량리까지 두시간 반이 걸렸다. 예전에는 네, 다섯 시간이 걸리던 길이다. 나는 기차를 아주 싫어했었다. 빈번하게 파고드는 터널의 어둠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터널의 어둠마저도 마치 오랫만에 보는 옛친구 같았다. 터널 속의 어둠이 바깥 풍경을 지우고 창에서 나를 들여다볼 때마다 여전히 까만 옛친구의 얼굴이 반가웠다.
청량리에 도착하자 완연히 다른 풍경이 나를 맞는다. 지천이던 초록대신 발에 채이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다. 가끔 인적이 지워지곤 했던 영월과 달리 외면을 하지 않는 이상 어디에서도 우리의 시야에서 인적을 지울 수가 없다. 종로3가에서 5호선으로 바꿔타고 공덕까지 간 뒤 공항철도를 타고 한강을 건너 방화의 거처로 돌아왔다.
영월역에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기차를 기다렸다. 그러나 서울에선 더 이상 그런 기다림은 없다. 집을 나가며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는 경우는 없다는 얘기이다. 서울은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질 못한다. 이곳에선 우리의 삶에 그런 기다림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숨막히는 곳이랴. 그러나 나는 기다림이 지워진 이 여유없고 복잡한 도시에 적응을 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나는 편안했다.
나는 고향에서 자란 시간보다 이제 서울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다.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시간을 우리의 몸에 새긴다. 고향 영월에 살면 영월의 시간이 우리의 몸에 새겨지고 서울에 살면 서울의 시간이 몸에 새겨진다. 그 시간의 속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로 완연하게 다르다. 우리는 몸에 새겨진 시간의 속도가 편하다. 내 몸은 고향에 내려갔을 때 몸이 기억하는 아득한 옛시간의 기억 속을 거닌다. 하루는 그 시간이 좋다. 서울로 돌아오면 몸이 벌써 서울의 시간을 편안해 하는 것이 역력하다. 하루의 옛시간을 살다 다시 내가 편안한 오늘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내가 편안한 서울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