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속으로 들다 – 연극 쇼케이스 <밝넌출 이야기>

Photo by Kim Dongwon
2023년 11월 5일 연극 쇼케이스 <밝넌출 이야기>
서울 동대문 창신동 골목의 시대여관

● 연극 쇼케이스 <밝넌출 이야기>를 보았다. 넌출은 줄기를 뜻하고 박넌출이니 박넝쿨이 된다. 줄기는 가늘고 길다. 그 가늘고 긴 줄기에 의지하여 커다란 박이 자라며 줄기는 박을 놓는 법이 없다. 하지만 연극 제목은 박을 밝으로 바꾼다. 박의 줄기에서 삶을 밝히는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을 보는 동안 우리는 한 여인의 삶이 가꾸어낸 밝은 넝쿨 줄기를 따라가게 된다.
● 공연은 동대문 창신동 골목의 시대여관에서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붐볐을 여관이지만 시대는 이제 여관을 시대에서 밀어내려 한다. 시대에서 밀려나면 여관은 무너진다. 하지만 시대가 밀어내는 여관의 자리를 예술은 한 시대를 살다간 삶을 극으로 구성하여 올리는 무대로 삼는다. 묵고 잠자던 시대여관의 시대가 예술로 다시 일어서는 시대로 새롭게 열린다. 무너지는 자리가 일어서는 자리가 된다.
● 작품에 대한 소개의 말을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6.25를 거치고 1959년에 이르기까지 한 여인이 겪어낸 사연많은 이야기이다. 여인의 이름은 김은례라고 했으며 1915년생이었다. 연극은 김은례가 쓴 수기 <박넌출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 대개 연극의 경험은 객석에 앉아 무대의 공연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대여관이 제공하는 독특한 공간 때문에 객석의 관객들은 모두 극에 둘러쌓여 보내는 독특한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객석을 둘러싸고 도처에서 배우들이 출몰하였으며, 관객은 배우들의 동선을 따라 좌우로 몸을 튼 것은 물론이고 종종 머리 위로 시선을 들어야 했다. 배우들은 객석의 한가운데를 수시로 지나가며 무대에서 보여주는 삶이 관객들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관객의 곁에 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고 하면 그 소문은 무대에서 소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소문을 들을 때처럼 관객의 바로 곁에서 소근거렸다. 관객은 극을 본 것이 아니라 극에 둘러쌓여 시간을 보냈다.
● 이 배우가 주인공인 김은례인가 하면 저 배우가 주인공인 김은례가 되었다. 나중에는 출연하는 배우 중에 한번쯤 김은례가 아니었던 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종종 형식은 의미가 되곤 한다. 출연 배우가 모두가 김은례가 되는 형식은 극을 보는 이에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을 사는 여인들 모두가 김은례가 아닐까 묻는 듯 했다.
● 여자와 남자 사이의 경계가 없었다. 여자 배우가 남자 역할을 하고, 그러다 다시 여자로 돌아왔다. 배우들은 여자와 남자 사이를 수시로 오갔다. 극의 내용은 남녀 사이의 차별이 컸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극의 형식은 남녀 사이의 구별을 지우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 또한 의미가 되었다. 배우가 자신의 성에 관계없이 남자와 여자를 넘나드는 형식은 남녀에 구별이 없지 않냐고 묻는 듯 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하자 극에 출연했던 배우 김현아는 세상에는 오직 인간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경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경계가 지워져 어떤 배우는 그 경계를 넘어가 소가 되었다. 배우는 소의 가면을 쓰고 몸동작으로 소를 표현했지만 나는 그가 단순히 움직임으로 소를 연기했다 생각지 않는다. 운좋게 그 배우가 바로 내 곁에 앉는 순간이 있어 나는 그의 눈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랍게도 소의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어릴 때 내가 보고 자란 소의 눈망울이었다. 나는 이 배우가 소를 연기하는 동안 정말 소의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 연극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언듯 생각하면 연극이란 어떤 삶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진다. 그러나 연극 <밝넌출 이야기>는 그러한 생각을 뒤흔든다. 배우들의 연기에 실린 그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란 삶의 재현이 아니라 어떤 삶이 가진 아름다움을 연기와 연출력으로 끌어내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미적 구성의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극은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은 연기에 실어 어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롭게 발굴해낸다. 연극 쇼케이스 <밝넌출 이야기>에서는 김은례의 삶이 그러했다.
● 대사 중에 “풀끝에 이슬”이란 대사가 있었다. 많은 대사들 중에 그 대사는 화살처럼 날아와 내 귀에 꽂혔다. 내가 송재학의 시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이란 시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현대적인 말이 아니라 백년전 유행했던 딱지본 소설의 한 구절이다. 짧은 대사 한 구절이 잠깐 나를 데리고 시의 세상을 다녀갔다. 오래 전에 지나간 세상이었다. 과거가 잠시 현재였다.
● 연극의 마무리 때 김은례의 아들 노상고가 특별출연하여 어머니와의 시간을 회고했다. 나는 연극을 삶의 재현이 아니라 삶에 대한 미적 재구성이라고 생각했으나 연극은 그냥 삶 그 자체였다.

4 thoughts on “극속으로 들다 – 연극 쇼케이스 <밝넌출 이야기>

  1. 벌써 2년째…. 정성어린 마음으로 글과 사진기록을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촬영 하시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관람을 하셨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공연은 사라지는 것인데, 이렇게 남을 수 있다니 참 기쁘네요 ^^

    1. 그날은 고마웠어요. 사진 찍기 좋게 자리를 잡아주셔서. 사진을 찍은 덕분에 관객으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겐 아주 좋았습니다. 김현아 배우님과의 인연이 좋은 연극으로 이어진 것이 저에게도 고맙기만 합니다. ^^

  2. Kim Dongwon 작가님을 이소선 합창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합창 단원으로서 첫 연대 공연을 나간 광화문 그 겨울, 강렬하면서도 겸손한 존재감의 김동원작가님!
    예술로서의 공감과 소통, 인간으로서의 연대와 노래로서의 행동, 기록으로서의 빛나는 지속과 아름답고 강인한 확장에 감사드립니다.
    -배우 김현아 아룀. 2023.11.6.

    1. 저도 배우님 만나서 좋았어요. 배우의 마력이 어떤 것인가를 영화나 연극 볼 때마다 실감나게 해주시네요.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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