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와 함께 텔레비젼을 보다 보면 가끔 되풀이하여 듣게 되는 소리가 있다.
아직도 한 겨울이건만 무슨 <봄날>인가 뭔가하는 제목을 들고 나와 화면을 채우고 있는 한 방송국의 드라마 속에서 고현정이란 이름의 탤런트가 나왔을 때 나는 그 얘기를 들었다. 언젠가, 이제는 제목을 망각의 늪 속으로 던져버린 한 드라마에서 황신혜란 이름의 탤런트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끄러미 텔레비젼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게 애 둘 낳은 아줌마 몸매 맞어?”
나의 그녀가 말하는 그녀들의 공통점은 애를 둘이나 낳은 아줌마들이란 것이었다. 아마도 나의 그녀는 그녀들을 보면서 그녀들의 몸매 옆에 자신의 몸매를 나란히 놓아보는게 아닌가 싶다.
아내나 어머니, 그러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이제 그 세월의 흐름을 얼굴에서 완연하게 읽어낼 수 있는 나이가 된 여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나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그녀들이 손을 휘저으며 내미는 거부의 이유는 얼굴에 주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찍고자 하는 것은 세월을 밀어낸 팽팽한 피부의 젊은 얼굴이 아니라 세월에 밀려 어느새 얼굴의 눈가로 잔주름의 밀물을 허용한 바로 그 얼굴이다. 그 얼굴의 주인들이 애를 둘 낳고도 세월의 흐름을 거꾸로 산 듯한 젊은 몸매의 탤런트들 앞에서 자꾸 왜소해지고 축소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는 <가구의 힘>이란 시를 떠올린다. 내가 그 시를 처음 대면한 것은 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발표된 지면 속에서 였다.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구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박형준, <가구의 힘>
몸매나 얼굴의 주름도 그런 것이 아니지. 허리를 가늠할 수 없는 늘어진 뱃살과 자글자글 끓고 있는 눈가의 주름도 삶의 기억을 끌고 다니는 오래된 가구와 같은 것이지. 세월에 닦이면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길들여지며 추억의 힘이 쌓여 그런 몸매가, 그런 주름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네가 갖고 있는 몸매의 힘이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몸매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몸매의 힘이지.
그렇게 나는 나의 그녀가 고현정의 몸매 옆으로 그녀의 몸매를 세워놓고 자꾸 위축된다 싶으면 서글픈 몸매론을 펼치곤 했으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곤 하였다.
One thought on “그녀의 힘”
멋진 몸매론이예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