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정반대로 꺾으면 때로 세상이 즐겁다 — 황인숙의 「희망」

Photo by Kim Dong Won

왜 갑자기 별이 떠오른 것일까?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황인숙, 「희망」 전문

희망이란 말은 우리의 일상 속에선 당연히 내일은 좋을 것이다라는 말과 엮여 진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반대이다. 어제가 좋았다는 말을 희망이란 말 아래 계속 반복하고 있다. 시인의 행보와는 어긋나게 일상적 표현으로 그 희망을 엮어나가 보면 내일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에 이어 오늘 생각해도 내일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로 그 뒤를 잇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 뒷자리는 내일이 좋을 것이다, 매일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수 있다. 마지막 장식 또한 내일도 내일이 좋을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이어 붙여야 희망이란 말에 어울린다. 물론 시인은 끝까지 우리들의 일상적 행보와는 정반대로 그의 걸음을 고집하고 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나는 별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별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꿈꾸곤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오늘 내가 올려다보는 별이 오늘의 별이 아니며, 안드로메다 운하에서 별이 내뿜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한달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한달이나 혹은 몇달 전의 별을 보며, 아니면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를 별을 보며 미래를, 희망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설악산 꼭대기에 올라가서도 전화를 주고 받아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첨단의 현대적 장비들로 무장을 한 채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과학은 오랫 동안 전해 내려온 사람들의 일상적 습관을 흔들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은 희망을 꿈꿀 때면 별을 올려다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들 인간이 평생 같은 표정을 얼굴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석고상도 아닌 다음에야 희망에 대한 그러한 습관이 조금 따분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김에 이번 기회에 그 방향을 한번 정반대로 바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즉 언제나 예외없이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거나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을 꿈꿀 것이 아니라 시선을 땅에 박거나 어제에 코를 들이밀고 희망의 향취를 맡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어제가 좋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지 않겠는가. 원래 희망은 미래형 시제에 실어야 옳지만 어제를 보면서 좋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희망의 색채에 어울리려면 아무리 어제가 나쁘더라도 좋다라는 긍정적 형용사로 수식을 해야 할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어제에 좋은 일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 식으로 나가면 무리없이 “어제가 좋았다”는 말을 희망을 이끄는 첫 어구로 입에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얻어지는 “어제가 좋았다”는 언술은 우리들을 수구 꼴통 분자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 어제가 좋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희망과 묶어놓고 있으니 그러한 위험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위험에 대해선 시인의 또 다른 시에서 도움을 얻으면 확실하게 그 경계선을 그어놓을 수 있다.
황인숙은 그의 첫 시집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에서 책의 표제로 쓰인 똑같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부분

“코를 막고”라는 말이 불러온 연상 작용 때문에 나는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새들이 하늘로 솟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못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으로 착각했다. 강원도 영월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여름이면 항상 개울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고, 그 때면 언제나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코를 막고 물 속으로 뛰어내리곤 했다. 물론 얏호하는 함성도 잊지 않았다.

내 고향 강원도 영월 문곡의 여름 풍경.
물이 돌아가는 곳이라고 하여 돌어서라고 불렀다.

나는 종종 그 때의 기억을 들추며 회상에 잠겨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곤 했지만 어느 경우에도 추억 속의 나는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뛰어내리고 있었으며, 나와 새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서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시인이 펼쳐놓은 시의 세상에서 새들은 우리들과 똑같이 코를 막고 솟아오르고 있었으며, 그 순간 나 또한 과거의 기억 속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비상의 즐거움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싯구절 속에서 갑자기 세상은 정반대로 뒤집혀 있었고, 나는 그 전도된 느낌을 그대로 끌고 추억 속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도된 추억 속에서 여름날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더욱 유쾌하고 즐거웠다.
바로 그렇게 시선을 정반대로 꺾어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느 한 방향으로 고착된 시선을 가졌을 때 우리들이 잃게 될 유쾌하고 즐거운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혹 아는가. 정말 과거에 희망의 씨앗이 숨쉬고 있을지. 그리고 눈여겨 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황인숙의 시 「희망」에서 그 어제는 드디어는 미래로 뒤바뀌고 있다.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그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정말 가장 강력한 희망은 어제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인용한 시는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에 실려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