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숲 – 남한산성에서

가을엔 숲에 가면,
특히 단풍으로 물든 숲에 가면,
마치 섬의 느낌이 나는 듯 합니다.
산의 단풍이 모두 일제히 물드는 것은 아니어서
이곳이나 저곳이 먼저 붉어지고,
그러면 그 붉은 곳이 섬처럼 떠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름내내 산은 초록의 물결로 일렁인 바다였지만
가을엔 그 바다에서 단풍을 물들이며
마치 화산처럼 붉게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붉게 일어선 숲은 그때부터 섬이 됩니다.
11월 2일, 남한산성에 갔을 때,
정말 숲이 붉은 섬처럼 저만치 떠 있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아마도 초록이었을 땐,
섬이라기 보다 그 느낌이 분명 숲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숲은 대지의 한자락으로 우리 사는 곳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섬은 그 대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저 홀로 바다에 떠 있습니다.
숲은 물이 들면 그때부터 섬의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는 마치 바다를 헤쳐 섬에 가듯
그 단풍의 섬으로 갑니다.

Photo by Kim Dong Won

섬에 가까이 간 우리는
한참 동안 시선의 초점을 잃고 맙니다.
단풍의 섬에선 단풍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그 풍경은 황홀하기 이를데 없거든요.
풍경이 황홀하면 우리는 풍경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면서도
시선의 초점을 버리고 맙니다.
아니 황홀한 풍경은 우리의 초점을 앗아가 버립니다.
우리 또한 주저없이 시선을 내놓고 넋을 잃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단풍의 붉은 색은
연두빛 잎사귀 사이를 이리저리 타고
마치 계곡의 물처럼 아래로 흘러내리며
우리의 시선을 앗아갑니다.
누구나 그 앞에 서면 한참 동안 붙박힌 듯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보통 잎은 여름내내 물을 머금고 삽니다.
하지만 단풍잎은 물대신 빛을 머금고
짧은 가을 한철을 건너갑니다.
그래서 잎은 물의 갈증에 시달리지만
단풍은 빛의 갈증에 시달립니다.
햇볕이 들면 단풍잎이 빛을 잔뜩 머금고
마치 형광물질처럼 빛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Photo by Kim Dong Won

단풍의 속을 슬쩍 들여다보면
속엔 아직 곳곳에 초록빛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단풍의 샘입이다.
단풍은 초록으로 샘이 솟아
가을로 흘러내릴 때쯤
붉은 색으로 낯빛을 단장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단풍의 숲 곳곳엔
여름의 샘이 푸르게 솟고 있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러다 단풍은 일거에 거대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붉은 가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Photo by Kim Dong Won

어찌보면 단풍의 숲은
붉고 노랗고 파란 별들의 하늘입니다.
별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게 아니라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양각색으로 빛을 냅니다.
단풍의 별은 색을 머금고
가을에 드디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Photo by Kim Dong Won

단풍의 숲, 그 가운데로 들어가 봅니다.
빛은 단풍숲의 속으로 따라오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주황색의 단풍잎에 눈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빛의 시선은 단풍잎에서 딱 멈추고 맙니다.
빛도 단풍잎에 눈이 부신게 역력하게 보입니다.

Photo by Kim Dong Won

가을엔 숲에 가면 마치 섬에 간 느낌입니다.
그 섬의 속으로 몸을 묻고 있으면
단풍잎이 팔을 뻗어 처마를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앉은 내 자리가 내 집이 됩니다.
처마끝으로 내다보는 바깥 세상에선
어디나 가을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가을엔 숲에 가면 마치 섬에 간 듯
대지와의 인연을 모두 버리고
그 섬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살던 세상을 바로 옆에 두고도
섬에 간 듯 세상을 잊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가을에 물든 단풍의 숲입니다.

8 thoughts on “단풍의 숲 – 남한산성에서

  1. 단풍의 섬에서 한 사흘간만이라도 혼자 지내봤음 좋겠어요.^^
    외롭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마냥 행복하고 신날것만 같아요.
    어수선함속의 단풍은 싫거든요.
    나만의 단풍잎으로 한잎한잎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요.
    욕심도 많죠?ㅋㅋ

    1. 저긴 눈길을 확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보건소 뒷편이었는데… 정말 섬처럼 보이더라구요. 등산로가 아니어서 그런지…

  2. 이번 주말에는 나들이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지 않았는데
    나가는 차안에서부터 후회했지 뭐예요.
    허구한 날 카메라 들고 낑낑 대느라 아이들에게 신경을 덜 쓴 것 같아
    이번에는 실컷 놀아줘야지 했거든요.
    고운 빛들은 지천이고 하는 수 없이 눈으로만 담아왔는데
    역시 두분 블로그에 오면 만사 오케이예요.^^

    1. 저는 예전에 카메라는 안가져가고 카메라 가방만 덜렁 메고 나간 적이 있었어요. 도착해서 가방을 열었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단풍이 워낙 고우니 이번 주에 카메라 둘러메고 한번 또 다녀오세요.

    1. 이때가 저녁 때라 빛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어서 좀 아쉬웠어요. 올라가면서 봐둔 곳이 또하나 있었는데 거긴 못들렀어요. 할 수 없죠, 뭐. 남한산성을 한바퀴 걸어서 돌면 좋은 사진 나올 듯도 한데… 올가을 사진찍기 참 좋네요.

  3. 붉은 단풍 밑에서 사진찍으면 조명이 따로없더군요
    얼굴도 불그스럼하고 예쁘게 잘나와요.
    언젠가 단풍잡고 찍은사진있는데 표정이 조금 섹시하게나왔더군요.
    안하던 화장을 했는데 잘못됐나봐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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