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집 속에 머물지 않고 시집 속을 빠져나와 우리의 세상을 시로 물들일 때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 문원민의 시 「정오의 그림자」도 내게 그런 순간을 안겨주었다.
시는 “잽싸게 피한 물웅덩이 위를/첨벙첨벙 걸어 나오는 발 없는 당신이/두 팔로 땅을 짚고 일어서며/물었지요 나는 왜 늘/당신의 왼손 약지에 매달려 있어야 하나요”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나는 “발 없는 당신”을 우리들의 그림자로 읽었다. 물웅덩이를 피해갔지만 그날따라 그림자가 물웅덩이에 그림자를 담그며 지나간 날이었구나 생각했다. 또한 그 시간의 그림자가 왼손 약지 쪽으로 드리워져 있었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거나 내가 서 있는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방향은 바뀐다. “당신의 시선이 내 오른손 반지에서/수줍게 빛”난다는 구절은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필 약지와 반지에 그림자가 걸리는 것을 보면 그림자는 우리가 드리우는 그늘이라기보다 우리가 놓지 못하는 꿈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이루겠다 약속한 꿈일 수도 있겠다. 그 꿈이 어느 누군가에 대한 사랑의 다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놓치 못하는 꿈이 있다.
꿈을 갖긴 해도 우리가 꿈을 이루고 살진 못한다. 마치 그림자가 시간과 우리가 향하는 방향에 따라 우리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빗나가듯이 꿈은 내 것이면서도 번번히 우리를 빗나간다. 우리의 몸은 그 빗나간 그림자의 현실이다.
느닷없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아예 그림자를 잊기까지 한다. 나는 그런 현실이 “빗발이 거셀수록 튀어 오르죠 당신은/내 오른팔을 기어이 꺾고 말죠 당신의 왼팔은”이라는 구절을 가져왔겠지 생각했다. 나도 물론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날, 비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뛰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왼팔이 오른팔을 꺾은 날이다. 현실을 핑계로 꿈을 무마해 버린 순간이 그 순간에 겹쳐진다.
그러나 빗나가면서도, 또 이제는 잊었는가 하면서도 우리에겐 버리지 못하는 꿈이 있다. 마치 그림자를 떼어 놓지 못하는 것처럼. 그 꿈과 나 사이에는 비스듬한 경사가 있다. “한 번도 혼자 서 있어 본 적 없는 당신과/나 사이의 경사”는 물끄러미 내려다 볼 때의 그림자에 닿는 우리 시선의 각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꿈은 우리의 정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스듬히 바라보는 각도의 아래쪽으로 우리의 곁에 함께 서 있다. 또 시인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적 없는/완벽한 당신의 알리바이”라 했으니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핑계 삼아 꿈을 접어가며 살고 있지만 그때마다 꿈은 그 알리바이에 의심을 제기하며 여전히 꿈이 우리 곁에 함께 있음을 환기시킨다. 꿈은 언젠가 우리가 꿈을 이루리라고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잊고 있는 우리를 끊임없는 의심으로 뒤흔든다.
시를 읽는 사이, 시간이 정오가 되었다. 시는 시를 읽고 있던 나를 일으켜 베란다로 가자 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자 정오예요
이제 안아 줄 시간이에요
나의 오른쪽과
당신의 왼쪽
두 개의 박동이
맞닿을 시간이에요
—문원민, 「정오의 그림자」 부분
살고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아파트 마당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정오는 그림자가 살구나무 아래로 둥글게 드리워지는 시간이다. 읽고 있던 시는 미리 시집을 나가 아파드 마당을 시로 물들인다. 그리고는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베란다로 나가 시로 물든 세상을 보자 한다. 나는 잠시 시로 물든 아파트 마당을 갖는다.
그 그림자를 내려다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나는 걸음을 아파트 마당으로 옮겨 살구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든다. 살구나무가 잊지 않고 있다가 정오마다 껴안는 꿈이 그 자리에 있다. 내 꿈을 껴안고 아파트 현관과 나무 사이의 짧은 거리를 걸어 잠시 살구나무의 꿈 속에 든다. 세상이 온통 꿈을 껴안는 시간이다. 한 편의 시가 시집 속을 걸어나와 세상을 온통 시로 물들이는 시간이다.
(2024년 6월 17일)
(인용한 시는 문원민 시집, 『파도라는 거짓말』, 풍월당, 2024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