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세상은 종종 시의 씨앗이 되곤 한다. 시의 소재라는 널리 알려진 표현대신 내가 굳이 씨앗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씨앗이 어떤 세상을 잉태하고 있다 발아하여 씨앗만의 세상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시는 세상을 씨앗처럼 품어 새롭고 다른 모습의 세상으로 발아시키는 측면이 있다.
시인 문원민의 시 「.– .- …- .」에서도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제목은 곧장 읽히질 않는다(나는 처음에는 그냥 점선선 점선과 같은 식으로 읽었다). 무엇인지 짐작이 어려운 이 시의 제목에 대해선 말미에 덧붙여 놓은 주가 “파도wave의 실제 모르스 부호 표기”라고 알려주고 있다. 일반적 표기로 환원하면 시의 제목은 파도인 셈이다. 시는 파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쉬지 않고 타전해 오는 부재중 모르스 신호
말씀하세요 제 몸에 당신의 글자를 새기겠습니다
—문원민, 「.– .- …- .」 부분
모르스 부호를 아는 사람에게 수평으로 선을 긋는 파도는 모르스 부호를 닮았다. 그 사실에 기대면 모르스 부호는 파도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문자로 삼은 파도의 상형문자가 된다. 모르스 부호가 되고 나면 그때부터 파도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써내려간 ‘글자’가 된다. 시를 읽은 사람은 암암리에 시인이 재편한 이러한 세상에 물든다. 그러면 그때부터 파도가 파도를 버리고 모르스 부호가 된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인천 강화도의 장화리에서 일몰의 바다를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일몰의 시간이 밀물 때와 겹치면서 끊임없이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겹겹으로 타전되는 모르스 부호였다. 그날따라 그 부호가 모두 지는 해가 타전하는 신호들 같았다.
문원민은 그 파도라는 형태의 모르스 부호를 “아무에게도 기록된 적 없는,/누구도 해독한 바 없는,/높고 낮음, 길고 짧음만으로/전하는 당신의 비의”라고 적어 놓았다. 파도를 모르스 부호라고 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타전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인은 또 “숨죽이고 써 내려간 당신의 교지,/읽으려는 찰나 또 한 말씀 남기시니/유배지로 전송된 조난신호를/오래오래 제 살갗 아래 봉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숨죽이고 써 내려”갔으니 몰래 쓴 것이다. ‘당신’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보낸 대상이 누군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는 지금 힘든 상황인 것 같다. 파도가 ‘조난신호’로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의 처지 또한 좋질 않다. 유배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난신호를 받았지만 달려갈 수가 없는 몸이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 신호를 “오래오래 제 살갗 아래 봉인하”는 것이다. 모르스 부호로 타전된 파도의 신호란 그런 것이다. 전달 받고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신호가 아니며 유배자들에게 전해지는 조난신호 같은 것이다. 유배자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신호는 유배자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시인이 누군가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갈 수 없는 날 바닷가에 섰다고 생각한다. 해독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날 모르스 부호의 형태를 띈 상형문자로 전해지는 파도는 그의 소식이 된다. 안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달려갈 수가 없다. 그래도 그런 날 우리는 그 신호를 몸에 새겨둘 수 있다. 항상 우리에겐 할 수 있는 최선이 있는 셈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무력하다. 무력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여지는 우리의 무력을 무마한다. 우리가 그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력감을 이겨내고 길고 오래 견딜 수 있다.
시를 읽고 난 뒤의 바닷가에서 나도 파도가 모르스 부호 형태의 상형문자로 전환되는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내 경험은 좀 달랐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지는 해는 누군가의 눈동자 같았다. 하루 종일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다가 원없이 마주하게 된 눈이었다. 드디어 눈을 맞춘 그 순간이 가슴 떨려 나는 그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의 마음은 파도에 실려 모르스 부호로 끊임없이 내게 타전되었다. 그날 내 곁에 한 여자가 함께 있었다. 해가 진 뒤 여자를 돌아보았을 때 여자가 저녁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손을 잡았을 때 타전된 신호들이 따뜻한 체온으로 내게 건너왔다.
시는 시인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르스 부호로 바뀐 파도가 바닷가에서 함께 서 있는 한 여자의 손에 모두 채집되고 채집된 신호가 체온으로 바뀌어 내게로 건너오는 신비로 확장된다. 시인은 세상을 씨앗 삼아 시로 발아시킨다. 그러면 또다른 세상이 열린다. 읽는 자에게서 그 시는 또다른 씨앗이 되어 신비로운 세상으로 다시 발아되기도 한다.
타전된 모르스 신호들이 속삭였다. 눈이 맞는 황홀은 저녁의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해.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계속 눈이 어긋나면서도 우리가 이 바닷가를 찾아오는데 바친 하루의 긴 시간이 견딜만한 것이 아닐까. 몸에 새겨둘만한 신호였다.
(2024년 8월 26일)
(인용한 시는 문원민 시집, 『파도라는 거짓말』, 풍월당, 2024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