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린 검은 색 — 송재학 시집 『검은 색』

Photo by Kim Dong Won
2025년 8월 4일 우리 집의 내 방 책상에서

책상 한 켠으로 쌓아놓은 책더미에서 검은 색이 흘러내렸다. 여기까지만 쓰면 검은 색은 흘러내리다는 말과 결합되어 어떤 액체가 된다. 그러면 문장은 기괴해진다. 사진은 책 더미에서 흘러내린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아래로 펼쳐져 있는 송재학 시집 『검은 색』의 표지이다.
때로 말은 우리 앞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 중에서 몇 가지를 삭제하면 분위기를 확연하게 바꾼다. 나는 『검은 색』이라는 송재학의 시집을 눈앞에 두고도 그것이 시집 표지라는 것을 숨기고 그냥 제목만 가져왔다. 그러자 말은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왜곡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평범한 눈앞의 풍경에서 말 몇 개를 삭제하여 분위기를 바꾸고 그 분위기를 즐기는 언어의 놀이가 될 수 있다. 쉬운 듯 해도 그 놀이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거의 예외없이 시집이란 말이 검은 색에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검은 색이란 아주 평범한 말이지만 그 말이 시집의 제목으로 묶여 있으면 우리는 그 결속을 쉽게 떼어놓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 습관이고 우리는 암암리에 그런 언어 습관에 질기게 묶여 있다. 검은 색이라는 이름의 시집 표지를 보면 그것에서 검은 색만 가져오지 않고 시집 표지라는 말을 예외 없이 붙이는 습관이기도 하다. 말의 자유란 때로 말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갖는 그 결속을 흩어 놓는데서 자유의 궁극을 맛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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