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딱 한번,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다.
내 고향의 뒷동산에서 였죠.
그 뒷산은 올라가 보면 뒤쪽으로 움푹하게 들어간 함몰지대가 있었고,
그 자리에 넓게 밭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내린 눈이 모두 그 밭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눈이 얼마 내리지 않아도 그 밭은 눈이 허리까지 빠지곤 했었죠.
눈이 허리까지 빠지면 거의 걸을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듯 눈밭에서 허우적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즐겁기는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기억입니다.
1월 15일,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대산에서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산을 넘었습니다.
어디 한번 같이 걸어보실래요.
산행이 시작되는 상원사 입구.
조금 올라가면 상원사가 나옵니다.
상원사는 이 길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높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절에 들리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래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곧장 산으로 향합니다.
절로 올라갔을 때는
한쪽켠으로 잘 찾아보면
산으로 향하는 또다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 가까운 곳의 초입이라 그런지
아직은 눈에 흙이 묻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에 묻혀 갖고간 흙입니다.
정류장까지는 차가 다녀야 하기 때문에
눈길에 모래를 뿌려 놓았습니다.
시간을 보니 이때가 9시 10분경이군요.
절의 한켠으로 나 있는 길로 오르다 보니
넘어진 나무 위로도 눈이 하얗게 엎드려 있습니다.
시간이 20분 정도 지났군요.
적멸보궁을 지났습니다.
적멸보궁까지는 길이 잘되어 있지만
이제부터는 좁은 산길입니다.
적멸보궁에선 15분 정도 사진을 찍으며 머물렀습니다.
이제 비로봉으로 향합니다.
시간을 보니 10시 25분입니다.
그래도 적멸보궁에서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까지는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눈길이 잘 다져져 있습니다.
어때요, 설매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면 딱 좋을 듯 보이죠.
이제 눈 위엔 어디에서도 흙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로봉을 바로 눈앞에 둔 지점입니다.
누군가가 미끄럼을 타고 내려간 흔적도 보입니다.
시간은 20분을 남겨놓고 12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바로 비로봉에 서게 됩니다.
이제 비로봉을 지났습니다.
지금부터는 상왕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길은 나 있지만 가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질 않습니다.
시간은 12시 10분을 넘기고 있습니다.
상원사에서 비로봉까지 올라오는 눈길이
사람들 무게로 잘 다져져 있던 것과 달리
상왕봉으로 가는 눈길은 벌써 깊이가 다릅니다.
조금만 길의 바깥을 딛어 보면 정강이까지 푹 빠져버리고 맙니다.
마음에는 저 고개를 넘어가면 상왕봉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왕봉은 멀었습니다.
이 고개의 위쪽엔 헬기장 있었습니다.
헬기장 두 개를 지나치니 상왕봉이 나옵니다.
이때는 12시 30분경.
상왕봉은 1시 40분경이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이제 상왕봉을 지나치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북대사까지 가야 합니다.
시간이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눈길이라기 보다
눈밭에 나 있는 홈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홈을 내놓지 않았다면
눈밭을 헤쳐 길을 간다는 건
아마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3년전엔 사람 발자국의 자취가 없어 비로봉을 포기했었죠.
드디어 상원사 주차장으로 가는 임도까지 내려왔습니다.
널찍한 길입니다.
하지만 깊은 눈으로 덮여
흙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길을 가면서도 길 위로 둥둥 떠가는 셈입니다.
북대사는 이곳에서 300미터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잠시 들러볼까 망설이다 그냥 상원사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그냥 온 것을 후회하긴 했습니다.
이제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중간에 질러가는 길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냥 널찍한 임도를 따라 내려갑니다.
길은 산을 싸고 이리저리 휘어지며
산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려갑니다.
임도로 내려서서 걷기 시작한지 또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오후 4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도 물리도록 눈길에서 놀다가겠다고
뽀드득 뽀드득 밟히는 눈소리로 박자를 맞추어 가며 걸어내려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4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내려온 길을 돌아보니
나와 함께 내려오던 길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훠이훠이 산으로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온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하얀 눈길이 나를 여기까지 바래다 준 것이었습니다.
눈이 온 날,
흙 한번 밟지 않고 눈길로만 오대산을 오르고 내렸더니
눈길이 산을 가는 나와 동무해 주었고,
내려올 때 주차장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차시간을 알아보니 버스가 5시 20분에 있다고 합니다.
길가에 앉아 한참 동안 쉬었습니다.
날씨는 추웠지만 휴식은 달콤했습니다.
7 thoughts on “눈길따라 넘어보는 오대산”
맞아요~누군가 눈을 치워놓으면 고맙기도하고…섭섭하기도 해요~ㅎㅎ
눈덮인 산길 가다가 두번이나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찢었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바지가 젖어서 그게 문제더군요.
이 나이에 뭔짓인가 싶기는 했지만 재미는 괜찮았어요.
그저 산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눈이 온 산에 올라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대단하세요 -_ㅠ
어렸을 때는 참 강원도에 눈이 많았어요.
차가 다니는 큰길이 눈으로 하얗게 덮였고,
지금처럼 모래를 뿌리지 않아 그 길이 그대로 썰매장이 되어 버렸죠.
이번에 산에 가보니 산중턱까지 누군가 부지런히 눈을 치웠더군요.
옆에 쌓인 눈으로 봐선 밤새 눈을 치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죠.
고맙기도 하고, 뭔가 섭섭하기도 하고…
그 고마우면서도 섭섭한 마음 알 것 같습니다.
오늘은 비가와서 그런지, 상상해보니 섭섭한 마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군요.
…..눈 치우시는 분은 대체 어떤 분이실지 살짝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와~ 눈이 많이와서 차도 다니기 힘들었다고 하던데~
고생하신 많큼 멋진 풍경과 자연을 보고 오셨겠죠~
기억에 오래 남으실 추억이 되겠네요~
다른 건 몰라도 흙하나 보이지 않는 희디흰 눈길은 참 좋더라구요.
볼만한 다른 사진들은 내일부터 슬슬 올리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