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좋아지면서 좀 먼 곳이라고 해도 아침 일찍 서두르면
그냥 버스를 타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강원도의 오대산이나 백담사도 그런 곳의 하나입니다.
두 곳 모두 늦게까지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가 있어
그것도 나름 편안한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1월 15일 화요일에 떠난 오대산 여행은 하루의 여정이었지만
갔다 온 뒤에 찍어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 일주일은 그곳에서 돌아다니다 온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오늘은 서울에서 적멸보궁까지만 가봅니다.
새벽같이 강변역의 동서울터미널로 나가 진부행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6시 32분 첫차입니다.
버스비는 11,800원.
승객은 열 명 남짓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버스가 한강변을 달릴 때
바깥의 서울은 아직 짙은 어둠에 쌓여있습니다.
어둠이 차창에 매달려 있으면
아무리 차창밖을 내다보아도 세상이 온통 어둠 뿐입니다.
하늘도 검고, 산도 검고, 그래서 어디에서도 경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리는 차창으로 다닥다닥 빈틈없이 붙어있는 어둠은
버스가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서 한참 속도를 올렸는데도
매달린 차창에서 절대로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 둡니다.
곧 힘이 빠질게 뻔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서울떠난지 40분 정도 지나자
어둠이 슬그머니 차창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차창밖에서 산과 하늘이 슬쩍 경계를 나누며 갈라서기 시작합니다.
새벽 여명이 붉게 동쪽에서 시작되면서
하늘이 먼저 지난 밤 내내 덮어두었던 어둠의 휘장을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에 이렇게 이른 아침 첫차를 타고
길을 나섰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한번 이렇게 나서보니, 이게 나서 볼만한 여행입니다.
보통 여름엔 여섯 시라고 해도 날이 훤한데
겨울이라 그런지 떠날 때는 바깥이 깜깜하고,
버스가 달리는 중에 바깥이 점점 밝아옵니다.
그래서 그냥 진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침을 향해 달리는 느낌입니다.
겨울에, 그것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한번 멀리 여행을 떠나보세요, 그것도 강원도로.
동쪽을 향해, 아침을 맞으러 부지런히 달려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 아주 좋았습니다.
버스가 한 시간여를 달리자,
아마도, 이제 영동고속도로로 바꿔탄 듯 한데,
바깥에서 마을이 희미하게 제 윤곽을 보여주며
나와 함께 아침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길옆의 가드레일 너머로
흰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첩첩이 포개지며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강원도에 온 것이 분명합니다.
산의 형세가 그렇고, 또 저렇게 많은 눈이 그렇습니다.
차창으로 하얗게 눈꽃이 핀 풍경들이 뛰어들어와서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달리는 버스를 세우고, 그냥 그곳에서 내리고 싶게 만드는 풍경들입니다.
눈이 오면 강원도의 겨울은 달리 찾아가야할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냥 꾹 참고 진부까지 가야 했습니다.
진부에서 내려 상원사가는 시내버스를 바꿔 탔습니다.
아침 나절, 마을에서만 찍을 수 있는 풍경들이 나를 유혹했지만 꾹참고 상원사로 갑니다.
바깥 세상이 하얗고, 시내버스의 차창엔 성애가 하얗습니다.
시내버스비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네요.
2500원을 약간 넘었던 것 같습니다.
현금으로 직접 내다보니…
시간되면 그냥 날 추운 날, 월정사까지만 가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진찍고,
그 다음엔 횡계쯤에 가서 대관령을 넘어가면서 사진을 찍은 뒤,
강릉으로 가서 서울로 올라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눈이 온 다음에 가야 겠지요.
상원사 입구에 도착하니
고드름이 아주 실하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 따가다 걸리면 혼날까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에
상원사에 잠깐 들렀습니다.
처마끝에 엄청난 크기의 고드름 하나가 독야청청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상원사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고드름을 조심하라는 문구와 만나게 됩니다.
하긴 저런 고드름에 한방 맞으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놓아버리게 될 것 같습니다.
슬슬 눈치보며 비켜갔습니다.
눈밭의 나무 그림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나뭇잎이 쌓여있는 숲으로 그림자를 들이밀면
낙옆의 색깔이 진해 그림자가 그 색에 묻히곤 하는데
눈이 내리면 나무 그림자가 숲으로 묻히는 법이 없습니다.
눈이 40~50센티미터는 온 것 같으니,
나무 그림자가 오늘은 땅으로 낮게 깔리질 않고
공중으로 붕 떠있는 셈입니다.
눈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마음도
종종 그렇게 괜스리 공중으로 붕 뜨곤 합니다.
오대산의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적멸보궁의 바로 아래쪽으로 나 있지만
그래도 어찌 적멸보궁을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잠시 들러서 이곳까지 왔다 내려갔던 3년전의 기억을 여기저기서 찾아보았습니다.
앗, 이상합니다.
여기가 더 높아서 더 추울 것 같은데
적멸보궁 처마끝의 고드름은 그만 영글다 말았습니다.
사실 적멸보궁 자리는 햇볕이 잘드는 아주 따뜻한 곳입니다.
높이로는 상원사에서 한참을 올라오지만
항상 이곳은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합니다.
고드름은 냉대성이라 햇볕이 따뜻한 이곳에선 영 작황이 좋질 않습니다.
고드름은 햇볕을 많이 먹으면 잘 자라지 못한다던데
역시 이곳이 햇볕이 많은 곳인가 봅니다.
적멸보궁 뒤뜰로 돌아가 보았더니
눈밭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새 한마리가
사람들이 놓아둔 먹이로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새모이를 팔더군요.
딱 주머니에 3만원만 넣고 떠난 몸이라
새모이를 사질 못했습니다.
눈이 오면 새들은 많이 당황하는 눈치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운지 여기저기 마구 기웃거리는게 눈에 보이거든요.
적멸보궁에서 내려오니
멧돼지가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문구가 사람들을 겁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멧돼지 조심해야 하는게 아니라
멧돼지가 사람 조심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만큼 무서운 게 어디에 있을라구요.
나도 산길을 가다보면 동물을 만나곤 하는데
노루는 여러 번 보았지만 아직 멧돼지는 한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산에 갔을 땐 멧돼지들이 단단히 주의를 하나 봅니다.
4 thoughts on “강원도 오대산 가는 길 1 – 서울에서 적멸보궁까지”
고드름 따다가 한 입 먹고싶군요. 혼나진 않겠죠?
너무 부지런 하신 것 같습니다. 본을 받아야되는데,
천성이라 그런지 고치기 쉽지가 않군요.
한 걸음만 더 움직이자.. 라고 되뇌이는 것도 참 쉬운게 아닙니다 ^^;
일에는 게으른데 이상하게 여행이나 노는 것엔 아주 부지런하게 됩니다.
아침이 찾아오는 느낌의 사진을 보니 제가 새벽을 맞는거 같습니다.
새벽을 본지도 오래되었네요~ㅎ
저도 여행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나 새벽을 맞곤 하는데 겨울에 하루 여행을 서두르니 이렇게 새벽을 맞게 되네요.
겨울 여행이 춥긴 하지만 나름대로 다른 재미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