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높이를 달리하면 풍경이 변한다는 것이다.
2월 16일에 올랐던 축령산은 그 변화의 즐거움이 더더욱 큰 산이었다.
보통 산의 높이는 처음에는 풍경을 가로막다가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슬쩍 시선의 앞을 열어주고
정상에 이르면 그 시선은 가장 멀리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축령산은 시선이 갈 수 있는 거리만 멀리 열어주는게 아니라
높이에 따라 그때그때 마치 슬라이드를 갈아끼우듯
눈앞의 풍경을 달리해 주곤 했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서 한 고비의 높이를 올라갈 때마다
또 다른 산을 들어온 느낌이었다.
산의 아래쪽에선 나무들이 키를 높이 세운다.
발돋움을 해도 우리가 그 높이의 위로 고개를 뺄 순 없다.
그래서 아래쪽을 내려다 보려면
가지 사이로 시선을 들이밀어야 한다.
겨울엔 그래도 가지 사이가 비어 시선의 방해가 덜하다.
우리가 올라온 마을이 가지 사이에 걸려 저만치 아래에 있다.
처음으로 경관이 트인 곳은 수리 바위.
동쪽은 산맥이 가로막아 시선을 서쪽으로 가져갔다.
시선은 막힌 쪽은 힘겨워하고, 트인 쪽은 시원해 한다.
높이는 마을과 산들을 아래쪽으로 밀어낸다.
한발을 딛고 올라가면 그 만큼 마을과 산을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셈이다.
등산이란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산을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독특한 보행의 경험이다.
시선은 여전히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마을은 좀더 밀려 내려갔다.
동쪽을 가로막고 있던 산의 등성으로 올라서는 순간
시선은 이제 등성을 타고 간다.
시선은 말타듯 등성을 타고 아래쪽 내달린다.
남이 바위까지 오르면 그 높이에선
시선을 산등성이에 올려 말타듯 산을 탈 수 있다.
동쪽으로 막혔던 시선은 등성에선
이제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엿본다.
동쪽의 풍경 속에서 산등성이들이 울끈불끈 힘을 과시하고 있다.
서쪽의 풍경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가장 낮은 곳으로 마을을 두고
산들이 섬처럼 점점히 흩어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이제 동쪽의 산맥이 보여주는 기세가 더욱 완연해진다.
멀리 청평호도 눈에 들어온다.
산들이 그 물에 푸르게 목을 축일 계절도 멀지 않았다.
드디어 정상.
정상에선 한자리에 서서 산지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시선을 막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북쪽으로 보니 그곳의 풍경은
거리를 두고 아득하게 떨어져 있다.
남쪽의 산맥은 축령상 정상에서 곧장 흘러내리며
남쪽과 동쪽으로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축령산 정상에서 보면
북쪽의 풍경은 멀지만 남쪽의 풍경은 가깝다.
남쪽 풍경의 사진 세 장을 대충 이어붙여 하나로 모았다.
낮은 데 있을 때면 지상의 풍경은 하나하나 흩어져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풍경을 하나하나 보고 다닌다.
나무를 보고, 계곡의 바위를 보며, 이리저리 휘어지는 길을 본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걸음하면,
한걸음 한걸음 높이를 높일 때마다,
풍경이 한 곳으로 모인다.
높이란 하나하나 따로 보던 풍경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정상은 높은 곳에 오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까지 천천히 올라 하나하나 흩어져 있는 풍경을 모아보라고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 우리는 그 날의 우리 걸음으로 높이를 쌓고
그 높이로 모은 풍경을 발아래 두고 하나로 내려다 본다.
그게 산을 오른 날의 뿌듯함이다.
4 thoughts on “높이와 풍경, 그 변화 – 축령산에서”
전생에 전 새였나봐요. 저렇게 높은곳만 보면 날고싶은 욕구가.^^
아마도 어릴때부터 나는 꿈을 많이 꾸어서 그런가봐요.
어젯밤엔 티코처럼 아주 작은차를 몰고 친정집가는 도로를
스릴있게 운전하다가 논두렁에 빠지기도하고 다행히 논이 얼어서
재빨리 나와 다시 도로로 달리고하는 꿈을 꾸었다죠.ㅋㅋ
저 아직 시내연수 안받아서 운전을 안하고 있는데
빨리 운전하고싶나봐요.^^
한동안 저도 하늘을 나는 꿈을 무지 많이 꾸었는데 요즘은 아무 꿈도 안꾸고 있어요.
저는 운전을 못해서 그런지 운전에는 뜻이 없고 봄이 오면 자전거 타고 하루 종일 어디로 가고 싶네요.
지하철만 타고 가도 사진 찍을 거는 많은 데 죄다 사람이라 찍지는 못하겠고 빨리 꽃피어서 꽃을 찍으러 다니고 싶네요.
사진을 주~욱 따라가다 보니 몸은 몰라도 눈은 축령산을 오른 느낌이예요.
눈이 올라갔다 오니 몸은 몰라도 가슴을 뻥 뚫린 느낌이네요.
어제 이재훈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문학이 구원은 될 수는 없어도 구원에 대한 욕망은 자극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이 나오더라구요. 끄덕끄덕했지요.
사진이 산의 체험이 될 순 없어도 산에 가도록 부추길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과 글은 모두 그 자극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