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주전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스코틀랜드에서 개최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골프 대회인
브리티시 오픈의 우승컵을 말함이다.
그 우승컵은 Claret Jug라고 불린다.
적포도주를 넣는 용도로 사용되는 은제 주전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주둥이가 넓고 손잡이가 달려있다.
생긴 모양은 우리들이 흔히 피처라고 부르는 잔과 비슷하지만 좀더 날씬하다.
그러나 그걸 주전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클래릿 저그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가끔 아무리 그 용도로 분리를 하여
어떤 말 아래 놓아두려고 해도
그렇게 하기엔 느낌이 너무 걸끄러워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있다.
클래릿 저그를 주전자라는 말 아래 놓아두려 했을 때도 그렇다.
역시 주전자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내게 있어 노란색의 양은 주전자이다.
용도는 클래릿 저그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이 풍기는 정서적 느낌은 판이하다.
말은 그렇게 그냥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깃든 우리의 정서적 느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클래릿 저그는 그들의 주전자가 되면서
우리로부터 멀찌감치 밀려나게 되고,
양은 주전자는 우리의 주전자가 되면서
우리 곁으로 바싹 다가 앉게 된다.
사실 지금은 이런 주전자를 흔하게 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주전자는 우선 가볍다.
그 가벼움 때문인지 우리의 주전자는
손잡이를 잡은 우리의 한손에 몸 전체를 가뿐하게 모두 내준다.
반면 클래릿 저그는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론 그 밑을 받쳐야 안정적이다.
또 우리의 주전자는 그 가벼움 때문에
주둥이를 스스럼 없이 우리의 입에 내준다.
우리는 한손으로 주전자를 들고
주둥이에 입을 맞춘 채
물이나 그속의 막걸리를 들이킨다.
클래릿 저그 속에 든 포도주를 그렇게 마신다고 생각하면 아주 이상하다.
그것은 잔에 따른 뒤에 마시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의 주전자가 거의 예외없이 약간씩 찌그러져 있는 것도
그것만의 독특한 느낌이다.
반듯하고 고른 새 양은 주전자가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우리의 주전자는 찌그러진 모습이 더욱 익숙하다.
그렇게 우리의 주전자엔 그것만의 독특한 정서적 느낌이,
클래릿 저그에는 그것만의 독특한 정서적 느낌이 깃들어 있다.
그 정서적 느낌의 익숙함 때문에
나는 우리의 주전자를 마주했을 때 마음이 편하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사진을 찍다가
바로 그 우리의 주전자를 만났다.
그날 주전자 하나가 그렇게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막걸리를 별로 좋아하질 않는데
그냥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날은 막걸리 한잔 걸치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클래릿 저그로 따라마시는
포도주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 또한 우리의 주전자와 마찬가지로
그것만의 독특한 정서적 느낌을 갖고 있으며,
그 느낌은 우리에겐 아주 새롭고 신선할 테니까.
주전자 하나를 두고도
동서양이 뒤섞여 어지러운 시대이다.
그러나 이 어지러움이 이 시대의 미덕인 것 같다.
모르겠다.
당분간 막걸리도 마시고, 포도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시고, 맥주도 마셔보자.
4 thoughts on “주전자”
그 우승컵 이름이 크래릿 저그였군요.^^
전 요즘 투명 유리 주전자를 하나 사고 싶어요.
커피를 끓이거나 녹차를 끓이거나 속이 보여서 더 향기로울것같거든요.^^
며칠전 남편이랑 검색하다 말았는데.^^
우리집 주전자는 투명 주전자예요.
스포츠 대회의 우승컵은 모두 독특한 이름이 있더라구요. 그거 알아보는 것도 재미나요. 알고 보면 독특한 이름이라기보다 그냥 우승컵의 일반적 명칭에 불과하지만요. Claret Jug도 우리말로 하면 포도주 주전자 정도되는 거죠.
맞아요. 투명주전자는 물을 넣는 그 순간부터
그 향을 미리 음미하는 것 같아서 저도 좋아해요.
물이 끓는 그 소리랑 모양이 가끔 음악처럼 들리기도 하고
물끓는 모습을 보면서 에디슨이 발명했다는 옛날 기억도 떠올리기도 하고…
투명 주전자에서 투명한 물을 끓여서 투명한 컵에 물을 넣고
허브 잎 몇개만 둥둥 띄워도 갑자기 기분이 향기로워지는 것도 좋고…
——-
저 주전자에 막걸이 받아다 마셨던 기억이 나.
뚜껑에 조금씩 따라서 몰래 마셨었는데…ㅎㅎ
그 맛이 막걸리 맛이야.
그래도 막걸리는 싫더라.
대학때 막걸리 먹고 필름 끊어진 이후로 막걸리 노 땡큐~
나는 당신이 원고쓸 때 내가 해줄게 별로 없다는게 좀 그렇더라.
원고란게 혼자서 끙끙 거리다 나오는거여서…(별 이상한 상상이…^^::)
그저 투명한 유리컵에 따끈한 차 한잔 가져다 줄게.
내가 마감 넘기는 법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마감을 하루 넘기고 말았네.
요즘은 왜 이렇게 일이 뭉쳐서 들어오는지.
원고 청탁받을 때는 분명히 비워놓았던 일정이 사흘이나 날아가버리고 마니까 너무 촉박해져 버렸다.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