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또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버스를 버리라.
버스는 차창으로 풍경을 선명하게 끌고 가며,
풍경이 선명할수록
당신은 당신이 가는 그 길의 거리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가까이 산다면 가까운대로,
그녀가 멀리 산다면 먼대로,
지상의 길에서 그녀와 당신 사이의 거리감은 꼼짝없이 그대로이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 당신에게 주는 나의 권고는
지하철을 타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당신의 그녀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만나야 할 곳에 살고 있지 않다면
그건 안타까운 노릇이긴 하지만
그러나 중간에 지하철을 집어넣어
당신의 그녀에게 가는 길을 다시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만나러 간 그녀는
서쪽의 어느 도시에 살고 있었고,
나는 그 도시의 옆으로 붙은 한 거대도시의 동쪽 귀퉁이에 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지하철에 몸을 담을 수 있었다.
그 지하철은 내가 사는 곳을 출발할 때는
땅속으로 몸을 묻고 어둠 속을 갔으나
그녀가 사는 곳에 이르렀을 때는 바깥으로 빠져나와
선명한 지상의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살면서 빨리, 자주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지만
그게 생각처럼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마음의 설레임이 지워진다.
나는 설악산 산자락 밑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설악산을 바라보며
마음의 설레임을 갖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곤 한다.
나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과연 바닷가에서
마음의 설레임을 갖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곤 한다.
그렇게 너무 가까우면 우리의 마음에서 설레임이 지워진다.
사랑하는 날엔 사람들 모두가 설레임보다 조급증을 자주 앓는다.
조급증은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가까이 두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아주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설레임과 조급증은 둘 모두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다.
조급증은 사랑을 오직 그녀에게만으로 축소시킨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 사랑에서 제외된다.
그 길도 사랑이라면 그 길에서 그렇게 조급증을 앓을 이유가 없다.
반면 설레임은 사랑을 그녀를 만난 그 순간만으로 축소시키는 법이 없다.
설레임은 사랑을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길위로 확대시킨다.
때문에 설레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의 그 거리감을
직접 차를 몰고 나서는 조급증으로 짧게 줄이고 삭제하는 법이 없다.
내가 지하철을 타라고 권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당신이 내 권고를 받아들여 지하철을 탔다면
이제 당신은 그녀에게 가는 내내
간간히 지하철이 잠깐씩 역에서 설 때마다 역사를 밝히고 있는 불빛 이외에는
어두컴컴한 흑빛 어둠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어둠을 당신의 상상력에 대한 밑거름으로 삼아
당신이 지하철이 아니라 지금 우주를 가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천호역은 소혹성 2478역이며,
광화문역은 소혹성 3459역이 된다.
당신이 아주 별자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계속 단조롭게 소혹성을 읊을 필요가 없이
그 각각의 역에서 쌍둥이자리나 처녀자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하철이 이제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을 달리는 순간
당신은 그렇게도 당신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그녀의 별,
바로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당신과 그녀 사이에는
지하철로 가서 만나는 1시간 30분의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속도로 1시간 30분을 달려야 만나는
지구와 우주의 어느 별 사이에 가로놓인
멀고 먼 아득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그 아득한 거리가 당신에게 설레임의 사랑을 준다.
그러니 그녀를 만나러 갈 때는
그녀와 당신이 사는 곳의 거리를 아득하게 벌리라.
그러면 당신은 가는 내내 설레일 수 있다.
조급증의 사랑은 그렇게 거리가 길면 갈증만 키울 뿐이며,
그녀를 놓고 돌아설 땐 아쉬움만 남길 뿐이다.
설레임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당신의 사랑이 설레임의 사랑일 때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과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모두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물든다.
그러면 당신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든지 길고 멀어도
항상 마음의 설레임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할 때,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반드시 지하철을 타고 가라.
그리고 마음이 조급하다면
그 조급함을 버리고
그 안에서 설레임의 사랑을 연습하도록 하라.
생각해보면 지하철을 타고 가 그녀를 만나는 것보다
우주를 가로질러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수십억의 인구 속에서 그녀를 만난 그 인연의 신비에 더욱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가던 날,
우주를 가로 지르는 그 아득한 거리를 넘어가 그녀를 만났다.
물론 가고 오는 내내 나는 설레었다.
6 thoughts on “설레임의 사랑”
음..오늘은 이글을 감상하고 있네요. 설레임,두근거림,
살며시 웃음지며 마음에 담아보는시간…
동원님께서도 글 참 넘잘쓰시네요.
설레임의 사랑이라,우주를 가로 질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싶은날입니다.
지하철은 여러모로 재미난 사랑의 공간인 것 같아요.
캄캄해서 안좋아 했는데 어차피 타고다녀야할 운명인데 사랑의 공간으로 바꾸어 보자는게 제 생각.
설레임, 설레이다.
‘설레’라는 글자모양이 정말 설레이게 생겼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근데 재미있는건 ‘설레’라고만 써놓으면 설레발치다 뭐 이런 식의
싼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설레임, 설레이다, 이런식으로 어미가 붙으면 글자모양이 참 아스라~하게 이쁘네요.
그럼 혹시 설레발치다는 사람이 사람을 설레이게 해서 사기치는 거 아닐까요? 혹시 그 둘이 같은 뿌리의 형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아니면 세대공감 올드앤뉴의 후유증 같기도…
사랑의 설레임을 즐기는 그 시간이야말로 정말 행복한 시간이지요.^^
으, 그 설레임은 생각만해도 몸이 떨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