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두번째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만남은 하나하나 모두 기록된다.
사진으로, 또 글로.
그리고 모든 기록은 공표된다, 내 블로그를 통해.
그래도 괜찮겠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그만 둘 것 같지 않은데.”
나는 그녀의 얘기를 내 뜻에 대한 동의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는대로,
술을 많이 먹어 휘청거리면 휘청거리는대로,
일로 바빠서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는대로,
그녀가 키가 크면 키가 큰대로,
또 작으면 작은대로,
그냥 그렇게 그녀가 내게 시간을 내줄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내준 시간을 내 글 속에 녹여
새로운 사랑의 테마를 엮어내고 싶었다.
나는 전혀 어떤 전형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단 기록하고,
그 다음에 그때그때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그녀가 내게 내준 시간 속에서 사랑의 테마를 건져올리고 싶었다.
그건 가능한 일일까.
어떤 전형의 사랑에 전혀 휘둘림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유심히 살피고
그때그때 감각의 포충망에 걸려드는 작은 실마리들을 매개로
순전히 도시적 감수성의 사랑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할까.
도시는 그녀의 고향이다.
반면 나의 고향은 강원도의 한 산골 마을이다.
나는 그곳에서 20여년을 자연과 함께 하며 자랐다.
나는 내 감수성이 자연에 있을 때 더욱 예민해지는 것을 많이 느낀다.
감수성이란 보이는 것의 이면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독특한 감각이다.
그것은 대상의 사전적 감각을 뿌리치고 그 너머로 넘어가
우리들로 하여금 또다른 감각의 지평 앞에 설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한 감수성의 가장 탁월한 예는 시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시인들을 좋아하고, 또 그들을 동경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또 그들에게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 도시를 버리려고만 했다.
나는 디지털 문명의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데 그들은 나의 문명을 혐오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수로 따지면
아마도 그녀처럼 도시를 고향으로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듯 싶다.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느낌이 잿빛으로 뿌옇기만한 한국의 거대 도시 서울엔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리고 도시 문명은 이제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시골까지 파급되고 있다.
이제는 시골 어디서도 할 수 있게 된 인터넷 얘기이다.
나는 사랑이 식물성에 가깝다고 보지만
그렇게 보기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고 있는 도시의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사랑을 식물성으로 국한하는 것은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짓 같다.
나는 그게 우리가 버리고 떠나버린 자연의 복수가 아니라
마치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대피한 나약한 우리들에 대한 자연의 폭력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두 연인이 함께 걸어가는 가을녘의 코스모스길과 같이
이제 식상하기 이를데 없는 구태의연한 공간에 사랑을 묶어두지 않고,
도시를 살고, 또 인터넷에 익숙한 그녀의 공간 속에서
사랑의 테마를 엮어내고 싶다.
첫 두 번의 만남은 나에게선 아주 좋았다.
나는 감각이 아주 예민하게 일어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녀의 담배와 한쪽 눈, 지하철, 그리고 핸드폰의 문자에 사랑을 새길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가끔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렇다고 자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둘 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빠 자주 얼굴을 마주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어찌보면 그게 일반적인 도시의 생활이다.
그러나 기대해 보시라.
잠깐잠깐 그녀와의 만남에서
이 도시와 현대 문명의 일상으로부터
내가 사랑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현재까지의 예감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