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골목에 세발 자전거 한 대가 버려져 있었다.
낡은 자전거였다.
누군가가 피카츄 자전거라고 했다.
골목에 차를 대는 사람들이 차를 댈 때마다
옆으로 약간씩 밀쳐놓곤 했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던 세발 자전거는
결국은 어느 집의 창문 앞,
차는 올라가지 못하는 한칸짜리 계단 위로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가져갈 생각은 않는다.
세발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볐을 아이도
전혀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아이도 찾을 생각을 않고,
사람들도 들고갈 생각을 않는다.
낡았기 때문이리라.
낡은 것은 낡아가면서
그것과 함께 한 사람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골목에 버려두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은 누군가의 세발 자전거가 아니라,
어느 집 아이가 어린 날 가졌던 삶의 일부이다.
누군가의 삶을 덜렁 들고간다는 것은 끔찍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암암리에 알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독하다고 해도
어린 누군가의 삶을 덜렁 들고갈 수는 없다는 것을.
새 것이라면 아마 벌써 누군가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새 것은 잃어버리면 서럽긴 하지만
아직은 어떤 아이의 삶의 일부가 되지 못한, 그냥 세발 자전거일 뿐이다.
그것은 가져가면 그때부터 누군가 다른 아이의 삶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 것이 버려져 있으면 욕심을 낸다.
그것은 아직 누군가의 삶이라기보다 그저 물건에 불과하므로.
낡은 자전거는 또
오랜 세월 한 아이와 함께 하며 그 아이의 일부가 되는 한편으로
동시에 아이가 물들인 삶으로 저도 생명을 갖는다.
생명을 가진 뒤로는 원래의 아이를 고집하는 법이 없다.
이 아이도 태워주고, 저 아이도 태워준다.
그때부터는 아이와 떨어져 골목에서 며칠씩 홀로 지내곤 한다.
어디에 버려두어도 남들이 덜렁 들고가는 법이 없다.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제 스스로 생명을 갖고 며칠씩 골목에서 지내며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것을.
물건을 덜렁 들고가긴 쉬워도
생명체는 선뜻 들고가기 어려운 법이다.
세발 자전거는
한 아이의 삶을 싣고 씽씽 달리면서 낡아가고
낡아가면서 제 스스로의 생명을 얻는다.
며칠 동안 골목에 낡은 세발 자전거 한 대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골목 구경을 하듯 머물다 갔다.
4 thoughts on “세발 자전거”
우하귀에 들고갈까 잠깐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담배 한대 다 피우며 갈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님 가출한 피카츄가 버렸는지도 모르겠고요.
고민한 사람이 전 분명히 아니군요.
제가 담배를 안피거든요.
새 것은요… 아직 그 아이의 일부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 아이의 희망이기도 해요.
그 희망이 점점 그 아이의 체취와 흔적으로 물들어 가는 게 헌 것이 되어가는지도 몰라요.
아 글쎄, 저희 둘째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킥보드를 작년 어린이날에 선물 받았는데요… 며칠이 안 지나서 놀이터에서 놀다가 옆에 두고 정신없이 모래놀이를 한 거예요. 이 녀석이 정신줄을 놓고 있는 사이에 그 쌤뺑이 킥보드를 누군가 덥썩했다지요.
아이의 생명이 그대로 흘러가 헌 것이 되기 전에 덥석 들고가기는 쉬울 지 몰라도 함께 달릴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는 며칠을 볶으면서 보낸다지요. 다시 사내라고 엄마를 달달 볶으면서요….ㅋ
헌 것은 내놓아도 자기 것이지만 새 것은 내놓으면 자기 것이 아니죠. 새 것은 그래서 조심해야 해요. 자기 것 같지만 언제든지 배신을 때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