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 속의 사랑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에서

처음에 커피잔 속에선
분명 커피밖에 보이질 않았다.
때문에 나는 커피의 맛에 탐닉했다.
하지만 난 커피 전문가도 아니고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난 이 커피는 어떻고,
또 저 커피는 어떻고를
분명한 선으로 갈라
커피의 맛을 품평해줄 입장이 못된다.
그렇긴 해도 또 나는
내가 마셔본 몇몇 커피집들의 커피맛을
기억 속에서 일깨우고
그 맛들을 내 마음대로 줄 세운 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의 맛을
그 줄의 맨앞으로 세우고는
그 맛에 대한 마음의 느낌을
“음, 맛있는데요”라는 말에 얹어 건네는 재주는 있다.
그렇게 커피는 맛이 있었다.
커피의 맛과 함께
커피잔도 좀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커피잔은 반듯하게 원을 그리며 무릎을 포개고
얌전하게 앉아있게 마련인데
이 번의 커피잔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신 뒤, 나는
“커피가 입속으로 물결치며 들어오는 느낌이예요”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천천히 줄어들며
우리들이 나누는 얘기와 함께
내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커피잔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때쯤
나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그 바닥에 어른거리는 무엇인가를 보고 말았다.
그건 사랑이었다.
분명 처음에 커피잔 속에서 본 것은
커피밖에 없었는데
그 커피의 아래쪽에
아주 엷게 사랑이 깔려있었다.
그 사랑,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의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 집의 그 커피잔 속에서 커피는
처음에는 커피잔의 굴곡을 따라 일렁이며
마치 파도처럼 우리의 입 속으로 밀려들다
나중에는 작은 원으로 축소되어
바닥에 얌전하게 앉은 자세로 홀로 고여있었다.
그러다 내가 잔을 기울여 입으로 가져가자
분명한 사랑의 문양을 그렸다.
하긴 사랑이란게 그렇긴 하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동요로 시작되어 파도처럼 밀려가다
나홀로 내 속에 쌓아두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마음을 기울여 누구에겐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긴 하니까.
그리고 그 때쯤 사랑이 마음의 동요가 아니라 드디어 사랑이 되는 법이니까.
사실 그 집 여자가 남편과 함께,
또 아이들과 함께 엮어가는 삶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집은 커피 한잔의 밑에도 사랑이 엷게 깔린 집이다.
그 집 커피, 맛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에서

8 thoughts on “커피잔 속의 사랑

  1. 커피 잔을 통해 입술에 닿는 그 부드러움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맛이야.
    흔히 부드러운 ㅋ ㅣ ㅅ ㅡ 의 맛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더라구.
    그 맛있는 커피집에 울 집 가까이에 있어서 넘 좋아.

    당신 이 글은 특히 참 좋다.^^

    1. 그건 너가 현장에 있어서 그래.
      글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 글에서 핸드드립한 커피맛을 느낄 수 있거든.
      다른 분들은 기계에서 빼서 물탄 느낌의 맛에서 그치게 되지(ㅋㅋ 누군가 저작권 침해라고 나올 거 같다).

  2. 오호~~~ 사랑이면서 뜨거운 심장이 합쳐진 커피이네요…
    단상이 깊은 사랑과 향을 내품고 있었군요.^&^

    1. 요즘의 그 집 커피 못마셔보셨죠?
      일단 마셔보시면 이게 짜고친게 아니란 걸 순식간에 아실 거예요.
      그 좋은 이웃을 어찌 저희 한테 양보하셨데요.
      우리 두고 못간다고 발목잡고 늘어지셨어야 했던 건데.. ㅋㅋ

  3. 완전….. 대박…..^^b

    요즘 애들이 최상급의 형용사들 즉, 너무 좋다. 감동이다. 감사하다. 대단하다.
    이런 형용사들을 표현할 때 뭉뚱그려 쓰는 표현이지요.
    아직 어설픈 커피 한 잔으로 사랑에 대해서 길어올리신 글이 감동이구요.
    진짜 카페를 하게되면 카페의 대문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읽고픈 글과 사진이네요.
    일단 이거 통째로 업어다가 내일 쯤 제 블로그 대문에 걸어두겠습니다.

    완전! 대박! ^^b

    1. 커피맛은 글보다 더 한수 위던 걸요.^^
      그날 오후 일정이 있었는데 취소하고 말았어요.
      커피마신 뒤의 여운이 너무 좋았거든요.
      오는 길에 그녀에게 속삭였죠.
      나 오늘 말이야 글을 두 개나 건졌어.
      두 분과 아이들의 아름다운 삶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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