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 남자의 유리문

Photo by Kim Dong Won
파주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여기 아주 커다란 유리문이 있습니다.
닫아두면 그때부터 커다란 유리창이 됩니다.
원래 문을 닫으면 세상이 닫히지만
유리문은 전혀 그렇질 않습니다.
문을 닫아두어도 세상이 훤하게 비칩니다.
줄을 맞추어 바깥으로 서 있는 대나무의 푸른 빛이 선명하게 보이고,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발걸음을 따라가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한계단 한계단 낮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투명하게 보여도
아무 것도 유리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비바람이 거센 날, 빗줄기가 아무리 거칠게 문을 두드려도
유리문은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도 안으로 들여주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리문이 항상 자유롭게 출입을 허용하는게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건 햇볕입니다.
문이 유리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열려있건 닫혀있던 햇볕의 출입은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났죠.
보통은 여자가 남자를 만나면
여자는 남자의 속으로 들어가고, 그때부터 남자는 유리문이 됩니다.
세상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비바람은 들 수 없는 바로 그 유리문이죠.
문을 닫아놓으면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남자가 하루 종일 세상일을 하면서 가꾸는
여자에 대한 따뜻한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유리문 속에서의 따뜻한 하루하루가 이 세상 여자들의 가장 큰 행복이죠.
세상이 너무 힘들 때
남자가 잠깐 문을 열고 비바람을 안으로 들여
여자에게 세상일의 힘겨움을 조금 맛보게 하는 경우가 있긴 해도
대부분은 문을 굳게 잠가놓고 따뜻한 사랑만 걸러서 그 안에 들이죠.
그런데 그 여자가 만난 그 남자는 좀 이상한 남자였습니다.
그녀도 물론 다른 여자들처럼 그 남자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남자도 여느 남자들처럼 투명한 유리문을 갖고 있었죠.
그가 유리문이니 그의 속에 있어도 세상이 훤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의 경우엔 좀 특이해서
그가 꽃을 들여다보면 그 한가운데서 꽃잎의 샘이 보였죠.
또 그가 밤송이를 들여다보면
가슴에 안을 수는 있어도 등에 업을 수는 없는 슬픈 사랑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유리문을 사랑하게 되었죠.
그래서 결국 그의 속에 둥지를 틀고 말았어요.
둥지를 틀고 며칠 못가서 그녀가 깨달은 것은
그의 유리문이 세상의 비바람을 하나도 막지 못하는 부실한 문이란 사실이었죠.
그래서 그의 속에 있을 때는
그의 속에 있는 것인지 그의 바깥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한동안 그의 속에서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그의 유리문 바깥으로 앙상한 겨울나무가 보이면
그것이 겨울의 쓸쓸함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뼈속까지 스며들어 가득차고,
그리하여 가슴 한가득 하늘이 차는 세상이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간단없이 들이치는 비바람 때문에
그 남자의 유리문 속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가 그의 속이 아니라
그의 바깥 비바람 부는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비바람이 하나 거침없이 자유롭게 들이치는 유리문이니 그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그녀는 이제 그냥 평범한 세상 남자들의 유리문이 그리웠죠.
바깥에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햇볕으로 따뜻하게 안을 달구는 바로 그 평범한 유리문말예요.
그녀는 이제 많이 후회가 되었죠.
후회도 후회지만 그 비바람을 모두 맞으며 오랜 세월을 그의 속에서 살았는데
그 속에서 버림받아 세상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니
그 억울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남자는 남자대로 또 조금 억울했습니다.
남자의 유리문은 원래 그렇게 글러먹은 유리문이었으니까요.
남자의 유리문은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냥 여전히 그런 거였으니까요.
그녀가 세상으로 나가버렸을 때도,
여전히 그 남자의 유리문은 세상 속의 그녀가 지하철로 퇴근을 할 때면
냉큼 그녀를 그 지하철의 퇴근길에서 들어내 바람에 싣고 돌아오고 있었죠.
오늘도 그 남자의 유리문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녀도 그 남자의 유리문 속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녀는 앞으로도 그 남자의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상 바깥으로 버려진 듯 힘겨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남자를 잘아는 내가 분명하게 밝혀둘 수 있는 것은
그 남자가 유리문 안의 그녀를 한번도 세상밖으로 버린 적이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또다시 그 남자의 속에서 그의 유리문 앞에
마치 둘의 첫날처럼 그렇게 서 있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파주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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