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 팔당 주변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순천이 그 무대이지만
안개가 내리면 팔당도 무진이 된다.
안개가 팔당을 지워버리고 그곳을 무진으로 바꾸어놓은 7월 29일 토요일,
나는 그녀와 함께 팔당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Photo by Kim Dong Won

섬은 원래 물 위에 떠 있으나
안개가 밀려오면
그때부터 섬은 안개 위로 떠오른다.

Photo by Kim Dong Won

안개는 엷다.
8할의 투명과 2할의 불투명,
혹은 7할의 투명과 3할의 불투명,
안개는 그렇게 투명과 불투명의 비율을 적당히 섞어
그날그날 농도가 다른 안개를 만들어낸다.

Photo by Cho Key Oak

안개는 세상을 하얗게 지운다.
아니 하얗게 칠한다.
아니 아니, 하얗게 덧입힌다.

Photo by Cho Key Oak

안개는 눈과는 다르다.
둘다 흰빛이지만 안개는 투명한 흰빛인 반면
눈은 불투명한 흰빛이다.
그래서 눈이 오면 세상이 지워지는 반면
안개는 투명한 흰빛으로 세상을 감싼다.
그 흰빛의 베일로 감싸면
평범하던 일상이 갑자기 신비를 갖기 시작한다.
일상이 너무 평범해서 따분하다면
그것의 3할 정도는 안개의 베일로 가려두는 것이 좋다.

Photo by Kim Dong Won

안개는 장막과도 또 다르다.
장막으로 세상을 가리면
그 두께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안개는 두께가 엷어 속이 비친다.
그러면서도 또 속이 흐릿하다.
보통은 흐릿하면 눈이 피곤한 법인데
안개의 베일 앞에 서면 사람들은 피곤한 법이 없다.
사람들이 그 흐릿함의 저 편을
시력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안개는 안개의 저 편을
시력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넘도록 만드는 신비를 갖고 있다.

Photo by Cho Key Oak

오늘은 멀리 보이는 강줄기가 하얗게 흐른다.
이런 날 배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로 서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주변으로 둥글게 배를 감싼 안개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은 곧 안개로 만들어진 안개의 방이 된다.
안개의 방은 그날그날 농도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크기야 어떻듯,
숨어들듯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그 안개의 방에 잠시 기거하고 싶은게 안개가 든 날
우리들의 심정이기도 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안개는 발이 달렸다.
스멀스멀 움직인다.
높은 나무를 타넘고, 또 숲을 타넘어 슬그머니 마을로 고개를 들이민다.

Photo by Kim Dong Won

백로는 온몸이 하얗다.
혹시 안개로 옷을 해입은 것이 아닐까.
그래도 몸을 가려야 하니
안개의 투명함은 버렸나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들이 매일 지나다녔고,
또 방금 전에도 지나친 길이 저만치 안개 속 어디엔가 묻혀있다.
짐작으로 어렴풋이 더듬어볼 수밖에 없는 그 길,
그 길이 저만치 어디엔가 있다.
저 곳에서 볼 땐 이곳이 신비로왔는데
이곳에서 보니 그곳이 신비롭다.

5 thoughts on “무진기행 – 팔당 주변에서

  1. 이런! 전 그날 업무차 양평에 갔었는데..
    내내 비가 내린 후라 움푹 페인 도로를
    지그 재그 곡예운전을 해야 했습니다.

    양평 구석 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그냥 눈으로만 영상을 담아두어야 했습니다.

    위 사진들은 오고 가며 담아 두었던
    아쉬움의 장면들이라 정말 반가웠습니다.

    요즘 연락도 못하던 차에
    안부 인사 올립니다. 꾸벅^^

    1. 우리는 이날 무수리라고 궁금하게 여기던 곳이 있었는데
      거길 들어가 봤어요.
      인적이 어찌나 뜸하던지 그곳의 한 비포장 길은 완전히 꿩들의 천국이더군요.
      언제 한번 자전거타고 누비고 싶어요.
      오랫동안 못보았으니 기회되는대로 술이나 한잔 합시다.

    2. 빗 속을 뚫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좀 미안하기도 하더라구요. 다행이 이 날은 안개가 죽여주는 날이라 운전대 잡고 가드레일 박을 뻔도 했지요. 바깥 풍경에 눈이 팔려서요~

      건재하시죠?
      하두 공사 모두 다망^^한지라~ 연락도 못하구.
      살구댁도 여전여전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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