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많은 것을 우리 속에 숨기고 살지만
나무도 제 속에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평생 속에 감추고 살다가
죽고 나서야 제 속을 꺼내보인다.
집의 기둥이나 창호지문의 창살이 된 나무들에게서
바로 그 속을 접할 수 있다.
경기도 양평의 노문리에 있는 이항로 고택에서
비오는 날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집을 여기저기 돌아보다
기둥과 창살이 된 나무들의 여기저기서
그 속을 만났다.
나무도 눈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나무는 죽어서 눈을 떴으며
그때부터 내내 두 눈 부릅뜨고
이곳의 세상을 지켜보며 살았다.
나무의 마음에 물결이 진 날이 있었다.
나무에게는 매일매일 찾아와
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 가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때면 나무의 가슴 속으로 매일매일 무엇인가 날아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잔잔히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져진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돌멩이는 전혀 아프질 않았다.
그 돌멩이는 나무의 가슴 속에서 파문을 그리며 번져나가곤 했다.
나중에 보니 그 자리에 옹이가 굳게 박혀 있었고,
주변으로는 그 옹이에서 번져나간 물결이 완연했다.
나무라고 하여
모든 것이 자연친화적일 것이라고 속단해선 곤란하다.
나무에게도 멋지게 넥타이를 매고
현대적 감각을 자랑하고픈 욕망이 있다.
대개의 나무가 그렇지 않지만 별종은 있는 법이다.
오래 그 품에 살다보면 닮게 된다.
나무는 대개 산의 품에 산다.
산에 오래 살다보면
등고선을 그리며
산처럼 높아지고 싶은 법이다.
가끔 나무에게도 마음의 울림이 있다.
마음의 울림이 어떤 문양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것도 동심원이다.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도 같은 문양이 그려지지만
울림이 만들어내는 동심원은
좀 느낌이 다르다.
마치 동심을 그리면서 깊어지는 느낌이랄까.
돌멩이가 뛰어들어 그리는 동심원은
설레임 같은게 묻어난다.
나무에게도 가끔 속으로 깊어지는 마음의 울림이 있다.
나무의 마음 속에선
때로 촛불이 일어나 빛이 되기도 하고,
또 귀가 한껏 열려 세상의 소리를 담기도 한다.
창틀에 자리를 한 나무의 촛불은 방안의 사랑을 밝혀주기도 하고
또 나무의 귀는 창호지에 엷게 배어드는 사랑의 속삭임을 엿듣기도 한다.
때로 닭살짓의 사랑을 밝히거나 엿들을 때는 닭살이 돋고
그 통에 문풍지가 부르르 떨릴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