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사는 동네 주조는 도쿄에서 키타쿠에 속해 있다.
키타쿠의 한문을 우리 식으로 읽으면 북구가 된다.
이름으로 미루어 도쿄의 북쪽에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구의 주조는 바로 옆으로 이타바시를 두고 있다.
길 하나 건너면 이타바시이다.
이타바시의 한문은 우리 식으로 읽으면 판교가 된다.
주조에서 신주쿠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면
바로 다음 역이 이타바시역이기도 하다.
와세다 가면서 이타바시로 가는 중에 차창으로
단풍든 나무가 아주 좋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개천을 하나 보았다.
그 풍경을 보면서 언제 저기 가서 사진을 찍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크기는 개천이었지만 구글 어스로 살펴보니 사쿠지강이라고 나온다.
11월 11일 오후 1시쯤 느지막히 학교로 가는 딸과 함께 집을 나와서
그 사쿠지강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길을 건넜기 때문에
이곳은 딸의 동네 주조가 아니라 이타바시이다.
조금 걷자 가로수가 아주 좋은 길이 나타났다.
나무는 모두 벚꽃 나무이다.
자전거를 탄 여자애 한 명이 내 앞에서 얼쩡거린다.
난 사진찍는 내가 신기해서 구경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바로 여자애의 남자 친구가 나타난다.
내 앞에서 얼쩡거린 것이 아니라 남자 친구를 기다린 것이었다.
둘은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그 가로수길을 달려갔다.
아름다운 길에서 많이 사랑하라.
나무는 오래 살면 속이 빈다.
처음에는 속을 알뜰히 채우면서 커가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채운 속을 비워내며 삶을 정리하는 것이 나무이다.
보통 그렇게 속이 비면 사람들이 그 속에 무엇인가를 채워서 치료를 해주는데
이 나무도 빈 속에 무엇인가를 채운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공으로 채워준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벌집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 다니는 길에 이런 벌집을 방치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신기하여 한참 요리조리 들여다 보았지만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 짐작으로는 버섯의 일종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원래 벽은 밋밋하다.
집의 주인도 그걸 알았는지
벽에 칠한 칠로 그 밋밋함에 변화를 주려고 했었나 보다.
그러나 칠을 하며 남겨둔 붓질의 자유분방한 질감도
벽의 밋밋함을 크게 넘어서진 못한다.
결국 주인은 마지막 승부수 삼아 화분 두 개를 내 걸었다.
많이 예뻤다.
눈높이에 걸려 있어 더욱 좋았다.
길거리에 올망졸망 늘어선 화분을 만났다.
집들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사람을 향해 눈길을 주는 느낌이 나질 않는다.
대부분의 집은 문이 잠겨 있고,
그 때문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 느낌이다.
길거리에 줄을 선 화분들의 느낌은 그렇지 않다.
화분의 꽃이나 작은 나무들은 지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가리지 않고 눈길을 준다.
드디어 사쿠지강에 도착했다.
실제로는 콘크리트 옹벽에 갇힌 수로형 하천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자연 하천이었겠지만
홍수 때문에 옹벽 안에 하천을 가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은 많지 않았다.
바닥에 배를 얕게 깔고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 양옆으로 단풍에 물든 가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물이 아니라 강옆의 가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물빛에 묻혀 찾기 어렵지만
오리 두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바람이 물표면을 헤저어 물결을 만들고 있었고
오리가 열심히 발을 저어 그 물결 속에 또 자신들의 물결을 새긴다.
바람의 물결은 고르게 퍼져 있었고,
오리의 물결은 이것만이 살길이라는 듯
오리의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람의 물결이 흔들렸다.
강변의 난간은
원래는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만
동시에 날벌레를 노리는 거미들의 좋은 사냥터가 되었다.
강변을 따라 가로등이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그 가로등이 불러들이는 날벌레들이 많다는 얘기이리라.
빛을 따라가면 때로 죽음을 만난다.
죽음은 때로 누군가의 성찬이다.
비극과 희극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자연의 삶이다.
흘러가던 물이 걸음을 한 계단 낮춘다.
큰강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리라.
물의 걸음은 걸음을 높이는 법이 없다.
항상 걸음을 낮추어 간다.
물이 걸음을 높이고 있다면 그건 걸음이 막혔다는 뜻이다.
낮추는 곳의 걸음은 언제나 흰빛으로 부서진다.
낮출 때 더 눈부시다는 뜻일까.
나무들이 강으로 손을 뻗는다.
마치 물빛을 건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물빛은 좋지만 물에는 손대지 마라.
물은 물빛만 하지는 못할테니.
도시가 원래 그렇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겉만 못할 때가 많다.
빛 하나가 내려와
바람이 일으킨 잔물결 위로 한바퀴 맴을 돌았다.
맴돈 빛을 강물이 소용돌이처럼 말아
제 품에 품었다.
가을이 나무 꼭대기까지 차 있다.
여름에는 여름이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엔 모든 계절을 비워둘 것이다.
나무는 여름에는 여름을 채우고,
가을에는 가을을 채우지만
겨울에는 그 모든 것을 비운다.
맞은 편 옹벽에 담쟁이가 보인다.
붉은 가을색을 아주 잘 챙겼다.
원래 담쟁이는 벽을 타고 기어가는 느낌이 나는데
멀리서 보니 마치 누가 담쟁이 잎을 옹벽에 뿌려놓은 듯하다.
담쟁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파른 삶을 산다.
가파른 삶 앞에선 항상 삶이 파랗게 질려 있을 것 같지만
가을의 담쟁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가을 담쟁이가 온몸으로 그 얘기를 전하며
붉은 몸짓으로 그려낸 가을 그림 하나를 걸어놓고 있었다.
저 편 옹벽에선 담쟁이가 붉은 가을 그림을 그리고
이 편의 난간 기둥에선 담쟁이가 난간을 가다 말고
기둥의 맨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는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 편의 담쟁이는 잠시 가파른 삶대신
한 줌의 평평한 공간에 몸을 의탁한채
담쟁이의 숙명적 삶을 걸어간 저 편 옹벽의 담쟁이를 응시한다.
하지만 어느 삶이 담쟁이가 꿈꾸는 삶인지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이렇게 강변을 따라 가을이 흘러가고 있는 곳에
하루 종일 자전거를 세워놓았다가 나중에 자전거를 타고 가면
자전거에 밴 가을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가을 향기가 풀풀 날리게 될까.
벚꽃 나무들은 모두 강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목을 길게 빼고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싶었던 것일까.
여름 한 때,
콘크리트 수로가 되어 버린 이 물길에 물이 차오르면
그 물에 닿을 듯 말듯 하기도 했을 듯하다.
가을은 그 인연에서 아련하게 멀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끔 투명한 빛속에 색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 많은 색을 갖고도 투명으로 뚫려있다니.
빛이 투명한 것은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하게 한
신의 저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은 딱 하나,
바로 세상의 온갖 것들에게 색을 나누어 주는 것.
노란 색을 나누어 받은 잎이 빛을 잔뜩 머금고 반짝였다.
이제 저주를 풀고 다니면서 빛이 신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 가진 자가 나눌 때 세상이 빛나고 나누는 자도 신이 난다.
강물과 강변의 자갈 사이에 가을이 있었다.
가을은 때로 강물 속으로 무자맥질을 하며 그 품을 파고들기도 했고,
강변의 자갈과 흘러가는 강물 사이에서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며 서성거리고 있기도 했다.
아예 강변의 자갈 위로 터를 잡으려는 가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강물은 흘러간다.
이 아름다운 가을을 자꾸만 뒤로 남기고.
잠깐 동안 강바닥에 누워 아래로 떠내려 가며
위로 올려다보는 강물의 가을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강물을 따라가지 않고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강물을 먼저가라 보내고 나는 잠시 가을과 함께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