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오규원의 시 「허공과 구멍」 중에서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허공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식 속에선 비어있는 공간이다. 비어있을 때 우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규원의 얘기를 따라가면 허공은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공간이다. 허공은 나무가 들어서면 나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새가 날아들면 새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 유형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 같지만, 그 유형의 존재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그것을 그 모습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허공이란 빈공간이다.
그런 생각을 앞에 내세우면 아무 것도 없을 때, 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슬퍼하거나 힘들어할 일이 아니다. 이미 차있다면 또다른 내 자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그때는 그 자리의 대상을 밀어내야 하며, 그 밀어내기가 갈등과 치열한 경쟁의 출발을 이룬다. 이미 차있는 공간이 아니라 빈공간, 즉 허공으로 눈을 돌려볼 일이다. 이미 차있는 자리를 밀고 들어가, 그 자리에서 나 아닌 나무나 새가 되는 것보다 허공으로 가서 내 자신이 될 일이다. 있는 공간에선 이미 있는 것들의 탈을 써야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선 내가 나로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