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있는 배

Photo by Kim Dong Won


옅은 바람이 불고 있는게 분명했다.
물의 표면에서 일렁이고 있는 문양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배는 돛을 날개처럼 세우고는 그 문양을 타고 물 위를 가고 있었다.
배와 물이 만났을 때의 가장 큰 매력은
물에는 길이 없으나
온통 어디로나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에 몸을 싣는 순간 물은 어디로나 배의 길이 되고 만다.
그곳에 한번 구획선을 그어 길이라 불리고 나면
그때부터 한자리에 굳어져 그 길로만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되는
지상의 길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허상.
사실 그 배는 계속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서울의 잠실 롯데 월드 뒤쪽으로 위치한 석촌호수에 그 배는 떠 있었고,
사실은 떠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한자리에 부동의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배의 신세는 사실 그 호수의 멀리 동쪽켠에서
항상 호수를 향하여 시선을 내리깔고
이제나 저제나 그 자리에 굳어 있는
몇채의 높다란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시는 살기는 편하지만
자꾸 그곳을 빠져나가 맛보는 하루의 일탈을 부추긴다.
배는 어찌보면 굳어있는 도시가 꿈꾸는 그 일탈의 세상이다.
그 일탈의 세상으로 자주 걸음하지 못하자
도시는 이제 그 허상으로 위안을 삼는다.
허상만으로도 그것이 주는 위안이 이리 큰 것을 보면
도시를 빠져나가 너른 바다에서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위안은
그것이 얼마나 클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오늘 배의 허상 앞에서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진다.

Photo by Kim Dong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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