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항상 새벽빛과 함께 시작된다 – 남해안 여행 3 여수 향일암과 오동도, 고흥 나로도

9월 7일, 여행 사흘째.
여행을 떠나면 거의 예외없이 항상 일찍 잠에서 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여행은 새벽빛과 함께 시작되어
석양이 선물하는 일몰의 빛과 함께 마감이 된다.
여행 사흘째 되던 날도 예외가 아니어서
새벽 다섯 시쯤 일어나 향일암에 올라갈 채비를 했으며,
여섯 시엔 이미 향일암에 올라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해뜨기 일보 직전, 향일암에서 바라본 바다.
두꺼운 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지만
태양이 오고 있다는 아침의 징조를 가릴 순 없었다.
태양은 하늘을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이며
하루를 붉게 열고 있었다.
구름의 위쪽으로 금방 확 불길이 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해가 떴다.
어제도 뜨고,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뜰 해이다.
그러면서도 해는 새롭다.
서울에선 매일매일 아침이 무료하게 밝는데
오늘 여수의 향일암에서 맞는 해는 새롭다.
해는 뜨고, 그 다음엔 진다.
그러나 향일암에 오르면
매일 뜨는 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살 때 무료하기 이를데 없던 우리들의 아침을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산마루 위로 머리를 내민 해는
그 빛을 세상 곳곳에 나누어 온누리를 훤하게 밝히는 한편으로
그 빛을 바다에 비단처럼 길게 깔아 빛의 수로를 만든다.
빛의 수로에선 태양볕에 물든 바다가 황금색으로 반짝거렸다.

Photo by Kim Dong Won

아침해를 뒷편으로 두고
그녀와 함께 사진을 한장 찍었다.
찍고 보니 아침해가 오늘의 우리 일행으로
함께 자리한 것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향일암의 대웅전 모습.
아마도 빛은 아침에 절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이리라.
그리고는 하룻동안 그곳에서 노닐다 가는 것이리라.

Photo by Kim Dong Won

향일암에서 내려오는 길.
바위와 바위가 맞물린 좁은 틈새 사이로
멀리 숨구멍처럼 통로를 보여주며 길이 트여있다.
실제로 그 통로가 숨구멍인지도 모른다.
그 좁은 길을 따라 향일암으로 올라가면
누구나 가슴 시원하게 숨이 트이는 경험을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이번 여행에서 내내 맨얼굴로 다녔던 그녀가
오늘은 화장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 여자이고 싶은 모양이다.
그녀가 화장을 하니
오늘 나는 남자이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된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가 묵었던 여수의 돌산읍 율림리 풍경.
이곳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면
그곳이 작금이란 동네이다.
작금으로 넘어가면서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가끔 묵었던 곳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큰 재미이다.
“야, 저기 우리가 묵었던 펜션이 보인다.”

Photo by Kim Dong Won

어제 저녁, 석양의 지는 해를 쫓아가다
잠시 들렀던 항구로 다시 들어갔다.
젊은 어부 한 사람이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나가서 한 다섯 시간 정도 일을 하고 들어온다고 했다.
우리의 일터는 하루 종일 굳어있는데
그의 일터는 쉼없이 일렁이는 살아있는 일터이다.
그가 일터로 가는 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녀가 말했다.
“여수에 왔는데 어떻게 오동도를 빼놓고 그냥 갈 수 있어.”
그리하여 우리는 오동도에 들렀으며,
이번에는 자전거를 내 자전거만 내렸다.
어제 무리를 했는지 그녀는 손목이 좀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내 자전거의 뒷자리에 싣고 오동도를 돌아다녔다.
사람들 눈총좀 받았다.
오동도 바닷가의 바위 위에서 그녀의 사진도 찍었다.
사진의 포즈로 어렴풋이 짐작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녀는 인어 아가씨였다.
인어 아가씨는 나랑 살면서 그냥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
아줌마가 되면서 바닷속을 유영하던 젊은 날의 기억을 잊어버렸으며
물에 들어가면 곧바로 가라앉을 정도로 몸도 무거워졌다.
그러니 세상의 인어 아가씨들이여, 조심하시라.
아무리 인어 아가씨라도 사람 잘못 만나면 그냥 평범한 아줌마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렇긴 해도 오늘 그녀는 인어 아가씨의 그 시절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동도의 용굴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멀리 산 위에 보이는 흰 건물은 등대.
등대에 전망대가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주변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동도를 나오는 입구의 방파제에서
갈매기들이 나란히 볕을 쐬고 있었다.
맨앞의 갈매기 한마리가 줄좀 똑바로 서라고 잔소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갈매기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아니, 제 뭐니.
여기가 무슨 군대니, 군대야.
줄은 무슨 줄이야.”
다른 갈매기들은 입을 삐죽삐죽 거리며 한마디씩 하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완전 무시 모드로 나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12시에서 1시 30분까지 오동도에서 머문 우리는
여수를 뒤로 하고 순천을 거쳐
고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고흥의 나로도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오늘의 행선지였다.
여수와 순천은 나에겐 낯이 익고 그녀에겐 처음인 곳이었지만
고흥은 우리 둘 모두에게 처음인 곳이었다.
차는 오후 네 시경, 고흥의 포두면 남성리란 곳에서 멈추었다.
물이 나간 넓은 뻘에서 마을 사람들이 바지락을 캐고 있었다.
뻘에 난 길을 따라 세 사람이 캔 바지락을 짊어지고 나오고 있었다.
젊은 어부가 인사를 건넨 우리를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녀회에서 나와 반지락을 캐는 것이라며
2만5천원을 받고 어민들에게만 캘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딱 오늘 하루만 그렇게 해준다고 했다.
뻘에도 경계가 있고, 주인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멀리 보이는 섬의 이름을 물었더니 소시랑섬이라고 했다.
젊은 어부는 바지락이 아니라 반지락이라고 했다.
물이 들어오면 배를 이용하여 반지락을 파올린다고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녀가 고흥이 고향인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하반이란 곳이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구불대는 산골길을 따라 하반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다섯 시.
하지만 그곳은 우주 센터을 짓기 위한 공사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나오는 길에 소 두 마리를 만났다.
소들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제들은 뭐야?
생긴 것은 우리 주인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해.”
“응, 제네들도 우리 주인이랑 똑같은 사람들이야.
하지만 저런 부류들은 흔히 바퀴벌레라고 부르지.
오래 쳐다보면 닭살이 돋으니까 조심하렴.”

Photo by Kim Dong Won

외나로도의 염포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일몰.
염포마을에 있는 이 해수욕장은 모래대신 바닷가에 자갈이 가득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저녁해는 산을 넘어간 뒤
하늘로 길게 빛을 쏘아올려
손을 흔드는 것으로 내일을 기약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차를 몰고 좀더 섬 깊숙이 들어가자
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해변이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 위에
달이 떠 있었다.
오늘은 해가 지고난 세상을 어둠이 꿀꺽 삼키려다
그만 목구멍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 때문에
어둠의 목에 보름달이 가시처럼 걸렸고,
그통에 어둠이 켁켁거리자
바다가 철썩철썩 거리며 한바탕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이번 여행에서 가장 호사스런 저녁을 보냈다.
양식으로 썰면서 맥주를 곁들여 기분을 냈고,
5만원이라는 방값을 만원 깎아 4만원짜리 방에 묵었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였고,
달빛이 스며들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가 묵은 곳, <하얀노을>
하얀 노을도 있냐고 물었더니
곱게 생긴 여주인은 겨울에 와서 이곳의 앞바다에 지는 노을을 보면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들뜬 기분 때문인지 밤 10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밤에 뭔짓 했는지는 아무 한테도 말 안해줄거다.

13 thoughts on “여행은 항상 새벽빛과 함께 시작된다 – 남해안 여행 3 여수 향일암과 오동도, 고흥 나로도

  1. 정말 아름다운 곳,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모습들예요.
    여행기를 읽으면, 세팀이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아요.
    주인공 두분, 여행기를 읽는 나, 예전에 이곳을 여행했던 지난날의 나…
    이렇게 두분과 나의 추억과 내가 함께 여행을 하네요.
    사람은 추억이 없으면 가슴이 메말라가니,
    그래서 그 가슴을 호흡하게 만드는 여행이
    참으로 좋은 영양제네요.
    .
    .
    김기사~ 운전해애~ 어~서~(요즘 유행하는 개그프로의 한대목…)
    여행내내 누가 운전하셨어요?

  2. 쿠오오오오+ㅁ+!!!!!!!!!!!!!!!!!!!!!!
    우선 지금 회사인지라 슬쩍 보았는데도 !!!
    이따 퇴근후 다시 찬찬히 봐야겠습니다
    너무 멋쥡니다!!!!꺄룰!

    1. 퇴근하면 여행 나흘째 얘기가 올라가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 일을 던져버리고 여행을 떠나요.
      그냥 생각은 머리 속에서 다 지워버리고.

  3. 아아 ㅠㅜ 너무 그림같은 사진들이에요!!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과 바닷물과 빛깔들은 인간이 따라하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추상화이네요!! ㅎㅎㅎ 다보고 들어와서 식사할 때도 너무 기분 뿌듯하고 좋으셨을꺼 같아요..

    그나저나… 항상 느끼는 건데 새들이 경치좋은데를 잘 아는거 같아요!
    경치좋은 바닷가나 섬이나 강가에가면 항상 떼지어서 먼저 가 있다니까요 ㅋㅋ

    1. 이상하게 노을이 질 때면
      새가 날아가면서 더 멋진 그림을 선물하기까지 하죠.
      경치좋은 데만 아는게 아니라 사진에 어떻게 찍혀야 하는지도 아는 것 같아요.

  4. 음..정말 통통이님 무지 행복하셨나봐요.^^
    진짜 인어아가씨 포즈예요.^^
    주황빛가득한 향일암에 하늘이랑 나로도의 달빛이랑 짙푸른 하늘도 멋져요.^^
    밤엔 사진 정리하셨겠죠뭐..ㅋㅋ

  5. ㅇ.,ㅇ;;;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가 만났군요…
    아줌마가 다 된 노처녀는 호기심이 딥따 많답니다…ㅋㅋㅋ
    아무튼 최근 포스팅은 정말 염장샷이에요~~!!

    1. 이런 글과 사진을 보니…결혼이 하고싶어지는군요….
      아직까지 별 불편이 없었는데….
      아퀴언니~~~우리 함 가보는거야~~~
      (요즘 왜 통 안보이는건지….-_-a….나몰래 남자가 생겼나….)

    2. 여행은 남자와 여자, 둘이 가는게 아주 좋아요.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남자와 여자는 할 일이 한가지 있거든요.
      혼자 가면 할 일이 없을 때 좀 난감해요.
      여행기는 한 열흘은 계속될 것 같은데… 두 분다 분발하삼.
      다들 왜 그 미모를 그냥 묵히는 거야,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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