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풍경은 삶이 밴 풍경이다 – 남해안 여행 2 순천만

9월 6일, 여행 이틀째.
풀벌레 소리에 묻혀 잠들었던 우리의 곤한 잠이 눈을 뜬 것은
새벽 세 시였다.
바깥은 컴컴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보니 비가 그쳐 있었다.
네 시면 세상이 훤했던 며칠전 대관령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남해 금산에 오르기 위해
그 시간에 다시 여장을 꾸렸다.
아직 건넌방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신 듯 했다.
우리는 소리를 죽여가며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Photo by Kim Dong Won

집을 나서니 다시 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빗발은 점점 굵어졌다.
우리는 들어올 때 봐두었던
양아리의 항구로 내려갔다.
항구에선 배 한척이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때가 새벽 네 시경.
남쪽은 동해를 지척에 둔 북쪽의 대관령과는 새벽이 오는 시간이 다른 듯 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우리는 항구를 빠져나와 남해 금산으로 차를 몰았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러나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금산에 오르는 것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우리는 금산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냥 어둠 속에 묻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
새벽엔 그 시간에 어둠이 씻기면서
아침이 맑게 동터온다.
가끔 길게 소음을 끌며 곁을 지나가는 차가 있었다.
그 이외에는 1시간 30분 가량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바깥에 오직 빗소리만이 그득했다.
비에 젖으면 몸이 젖고,
몸이 젖으면 빗속에서 오래 견디기가 어렵다.
때문에 빗속에서 오래도록 비와 함께 하려면
사실은 빗소리에 젖어야 한다.
우리는 차 속에서 바깥에 내리는 빗소리에 젖고 있었다.
빗소리에 젖으면 그 소리에 젖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함께 젖는다.
우리는 빗소리에 젖으면서 서로에게 젖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는 금산에 오르는 것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차를 순천만으로 몰았다.
순천만의 대대포구에 도착한 것은 아침 여덟 시.
순천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용산에 올랐다.
나는 산을 올라가며 그녀에게 농담을 했다.
“혹시 이 산에 올라가면 서울의 용산이 나오는 거 아냐.
아니, 이거 뭐야. 어렵게 남해까지 내려갔는데 왜 용산이 나오는 거야.
다시 순천만으로 돌려보내줘.”
그러면 철도청에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할 거다.
“올라올 때는 이렇게 올라오셔도
다시 순천만으로 내려갈 때는 그렇게 안됩니다.
내려갈 때는 항상 KTX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 걸음마다 한마디씩 얘기가 밟히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드디어 용산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비 때문에 날씨가 흐리긴 했지만
순천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Photo by Kim Dong Won

용산에서 한참을 머물다 내려왔다.
예전에는 대대포구에선 용산으로 가는 길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곳으로 곧장 갈 수 있도록 갈대밭 사이로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길로 편안하게 갔다가 왔다.
나는 언젠가 새벽 기차를 타고 순천에 내려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기억이 있다.
내 기억이 서린 곳을 오늘 새로난 길을 따라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오전 10시.
우리는 순천만 깊숙이 이동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전거를 내려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순천만의 해변은 길이 평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편하다.
물론 고갯길이 있기야 하지만
그냥 땀좀 쏟으면 올라갈만 하다.
자전거를 내려 타고 다닐 때쯤 하늘이 맑게 개이기 시작했다.
빛이 좋았고, 구름도 좋았다.
11시 30분쯤,
그녀와 함께 길가의 한 식당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곳에서 짱뚱어탕을 먹었다.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다.
맛있었다.
그때 나온 고구마는 따로 싸서 챙겨둔 뒤,
나중에 차 속에서 먹으며 다녔다.

Photo by Kim Dong Won

뻘은 우리에겐 풍경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삶의 공간이다.
뻘배를 밀고 가는 그의 일이
그에겐 일이지만 우리에겐 풍경이 된다.
도시는 그게 어렵다.
일의 공간은 일의 공간이고,
풍경은 풍경으로 선을 그어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선 삶의 공간과 풍경이 혼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은 삶이 밴 풍경이다.
순천만의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은 것은
바로 이곳 사람들의 삶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삶이 만들어낸 풍경이기 때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난 지나는 경운기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순천만의 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머리 위로는 구름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구름은 멀리 하늘 위로 떠 있었지만
내 자전거도 길을 가는게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아무래도 오늘 구름은
전국에서 모두 이 순천만으로 모여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구름의 퍼레이드는
일정이 예정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우리는 재수좋게 그 일정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는 중간에 한 어부에게 물빠지는 시간을 물어 두었다.
오후 1시 30분경에 물이 가장 멀리 빠져나간다고 했다.
나는 그 시간에 맞추어 다시 용산으로 올랐다.
이번에는 그녀와 함께 가지 않고 나만 올랐다.
그녀는 대신 용산 아래쪽의 한적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들으니 시원한 바람이 투명한 부채질로
그녀의 피곤을 식혀주었고,
바람의 부채질에 몸을 기대었더니 자기도 모르게 잠깐 잠이 들었다고 했다.
용산으로 오르는 길에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길과 논, 산, 구름을 배경으로 삼아
집 한채가 그림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가끔 우리는 풍경의 앞에 서면 가슴이 뛴다.
용산에서 내려다본 이 날의 풍경이 그랬다.

Photo by Kim Dong Won

물이 물러나면
그 자리엔 뻘만 남는게 아니라
물의 길이 생긴다.
물이 몰려왔을 때는
어디나 물의 길이지만
물이 물러나면
그때부터는 물도 길을 따라 바다로 간다.
물은 걸음이 바쁘질 않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리 휘어지고 저리 휘어지며
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간다.

Photo by Kim Dong Won

사람들이 바다에서 돌아온다.
먼저 돌아온 사람들이
바닷물에 뻘의 흙을 씻어낸다.
잔잔하고 고요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작은 배 한척이 뻘 위에 떠 있다.
작은 구름 하나가 하늘에 떠 있다.
뻘은 작은 배의 하늘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순천만을 떠난 우리는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이 있는 여수의 돌산도로 들어갔다.
여행 이틀째,
우리는 돌산도의 신기에서 일몰을 지켜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여행 이틀째의 여장은
향일암 아래쪽에 있는 돌산율림리의 풍경화 팬션에서 풀었다.
가장 싼 3만원짜리 방에서 묵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닷가로 걸어나가 저녁을 먹었다.
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6 thoughts on “그곳의 풍경은 삶이 밴 풍경이다 – 남해안 여행 2 순천만

  1. 여기는 아는데네요…그래서 더 반갑네요…^^
    이렇게 다닐라믄 차부터 사고…
    에…..통장이 우울한 관계로 패쓰~!
    -_-a…

    1. 어디, 어디요?
      순천? 아, 맞아. 순천에 형부가 살고 계시다고 했지.
      그럼 차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냥 버스나 기차타고 형부네 집에 가면 되지.
      그런 좋은데 형부가 살면 무슨 걱정이람.
      나같으면 시간 날 때마다 내려가서 민폐끼치겠다.

    2. 저희 큰언니네도 아직도 신혼이랍니다..
      머 서른 중반에 늦게 만나 결혼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신혼같애요..
      그래서 처제들 오는거 싫어하시죠…

      봄에 3박4일예정으로 내려갔는데….(내려오라고 말씀하실땐 구경할거가 많다고 넉넉히 일주일예정으로 오라고하셔놓구선…) 하룻밤자고 이틀째 잘라고하니깐 형부 왈..
      ” 처제, 서울에 안가??”

      -_-;;;;;
      아~~놔 대략 난감이었답니다…
      ㅋㅋㅋㅋ…

      100% 실화입니다~ㅋ

    3. 혹시 둘 사이에 끼어잔 건 아니시겠죠.

      순천은 볼게 너무 너무 많아요.
      여수도 가깝고, 섬진강도 가깝고.
      버스타고 돌아다니면 또 그 여행의 맛이 남다르죠.
      남쪽에 연고가 있다는 건 그런 면에서 큰 행운.

      이번 여행에서도 순천이 가장 좋았죠.
      옛날에 내려왔을 때 걸어서 다녔던 곳을 자전거로 갈 때의 기분은 특히 끝내 줬다는…

    1.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 가능한 듯.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가족 여행도 참 좋은데
      이때쯤 따라나서질 않아요.
      대체로 보니까 아이가 대학 들어가고 나서 둘이 여행다니기 시작하더라구요.
      우리 애는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래도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여행에서 올라온 날은 우리 방에 와서 함께 자던걸요.
      뭐, 핑게는 제 방이 춥다는 거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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