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여행 닷새째.
잠에서 깨니 새벽 다섯 시였다.
보성차밭을 돌아보고 다시 민박집으로 들어와서 샤워하고 나갈까 하다가
그냥 곧바로 짐을 싸서 나가기로 했다.
민박집을 나선 시간은 여섯 시였다.
아직 하늘에 달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어제 이곳으로 들어올 때,
근처에 공룡알 화석지가 있다는 표지판을 본 것 같다며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보성의 득량면 비봉리에 있는 그 화석지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바다를 끼고 있었으며,
달리는 내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화석지에선 전문가가 아니면
공룡알의 화석을 바위에서 구분해 낸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대신 나는 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간 그곳의 해변에서 다른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바위의 눈’이라 이름붙였다.
물은 들어왔다 나가면서 항상 바위에게 눈을 선물하고 나간다.
‘바위의 눈’은 물이 마를 때까지
먼하늘의 구름을 제 눈 속에 담아둔다.
바위의 몸은 굳어있지만 눈을 가진 바위는
시선을 띄워 멀리 하늘까지 날아갈 수 있다.
먼옛날 그곳에서 살았던 공룡들도 가끔 하늘을 쳐다보았을까.
혹 공룡들의 눈이 바위의 눈 같지는 않았을까.
비봉리의 공룡알 화석지에서 또 하나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물 위로 튀어오르고 있는 물고기들이었다.
물고기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장면은 잡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튀어오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물고기들은
3단이나 5단 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물고기들은 도움닫기를 하여 물속을 달린 뒤
물 위로 몸을 날려 통-통-통 튀어가고 있었다.
아니, 아니, 그건 튀어가는 게 아니라 아침 바다를 날고 있는 것이었다.
야호, 신난다! 그런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물고기들의 아침을 그렇게 신나게 시작되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나는데
새들은 날개를 접고
물이 빠진 뻘밭의 바위 위에서
조용히 아침을 맞고 있었다.
그렇게 물고기에겐 나는 것이 달콤하고
새들에겐 날개를 접고 맛보는 한 자리의 휴식이 달콤하다.
어제의 그 보성차밭에 다시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하지만 갑자기 가는 빗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샛길로 들어가
멀리 아래쪽으로 보이는 동네로 들어가 보자고 했다.
가는 중간에 다시 비가 그쳤다.
나는 차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나를 기다리던 그녀가 잠깐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곤했나 보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도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못했다.
차밭을 찍을 때의 좋은 점은 역시
그 곡선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이지만
그 곁에 있을 때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은은한 녹차 특유의 향기가 난다는 것이다.
녹차를 마시면 그 맛은 입속으로 녹아들지만
녹차밭을 거닐면 그 향기를 온몸에 두를 수 있다.
마을에 들어가선 마당 가득 단지가 모여있는 집앞에 차를 세웠다.
‘선다울’이란 간판이 걸려있었다.
모두 옛날 방식으로 구은 단지들이라고 했다.
단지를 모으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안다닌 곳이 없다고 했다.
500여개에 이른다고 했다.
단지 속에선 된장과 고추장이 익고 있었다.
안주인이 아침을 먹다말고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런 저런 차 얘기도 하고, 차를 끓이는 법도 알려주었다.
대접받은 차를 한모금 마신 뒤,
“아니, 이게 무슨 차인데 이렇게 맛있는 거죠?” 하고 물었더니
‘우전차’라고 했다.
아니, 그 비싼 차를 얻어먹다니.
차의 종류도 알게 되었고,
차를 우려낸 뒤의 녹차잎을
그냥 먹어도 되고, 무쳐 먹어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깥 주인이 카메라를 보더니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전망좋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선다울의 바깥 주인이 알려준데로 갔더니
정말 그곳에 풍경이 숨어 있었다.
녹차밭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이게 정원인지, 녹차밭인지 자꾸만 헷갈렸다.
녹차밭은 산허리의 파도를 타고 일렁이기도 했다.
멀리 우리가 지나온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항상 풍경은 큰길가로 나와 있는 법이 없는 것 같다.
풍경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샛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보성차밭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결국 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도움을 얻어
비로소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나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승용차를 제공하고 모든 준비를 다 자신이 할테니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을 떠나면
갑자기 카메라를 둘러맨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같이간 사람을 기다림 속에 방치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내 나를 쫓아다니기도 어렵다.
그렇게 하다간 금방 체력이 바닥나기 쉽다.
나는 보기보다 상당히 체력이 강하다.
항상 나랑 여행을 할 때 기다림 속에 버려진 느낌에 시달렸던 그녀는
이번에는 나 이외에도 여러가지 동행할 친구들을 챙겼다.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가 그 중의 하나였고,
음악도 그녀의 또다른 친구였다.
작은 디지털 카메라도 그녀의 손에 매달려 여행내내 그녀와 함께 했다.
내가 기다림 속에 그녀를 방치하자
오늘 그녀는 풍경이 좋은 곳에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나무가 햇볕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바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르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스스르 잠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기다림 속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자기 그림을 엮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서 함께 그림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워 잠깐 함께 눈을 붙였다.
파란 하늘이 우리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큰소득 중의 하나는
18번 국도의 발견이다.
나는 그녀에게 18번 국도를 따라 쭉 올라가면 된다고 말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이거 이 길을 따라가면
씨발씨발하면서 가게 되는 거 아냐’ 라고 농담을 했었다.
잠시후 그 길에 들어선 나는 좀전의 그 경망스런 농담이 미안해지고 말았다.
담양에도 이런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있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길게 이어지진 않았던 기억이다.
풍경은 항상 길옆에 있게 마련인데
간혹 길이 곧 풍경이 된다.
18번 국도도 그런 길 중의 하나이다.
18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다
순천의 송광사 표지를 보았다.
신혼여행 때 같은 이름의 절에 들린 적이 있었지만
들어가보니 그게 순천의 송광사는 아니었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 아치형의 돌다리가
아래쪽 개울물에 다리 위의 세상을 담아놓고 있었다.
순천 송광사의 대웅전.
오늘보니 지붕이 마치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부처님은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그 앞에선 세상이 고요하고,
또 마음도 고요해진다.
문을 열면 바깥 풍경이 한가득 창을 채워주고
문을 닫으면 부처님이 방안을 가득 채워준다.
송광사를 나오는 길에 다람쥐를 만났다.
‘다람쥐야, 우리는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이번 여행은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거 같아.
너도 이번 여행에서 만난 추억의 하나가 되었네.
다음 번에 내려오면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다람쥐는 못들은 척 그냥 무엇인가를 먹는데만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백양사 휴게소, 여산 휴게소, 죽암 휴게소, 음성 휴게소에서 쉬어가며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밤 아홉 시에 못미쳐 있었다.
올라온 뒤 며칠 동안 여행 후유증에 시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꾸 여행지로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들뜬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집은 또 집대로 좋다.
10 thoughts on “아름다운 18번 국도 – 남해안 여행 5 보성 차밭과 순천 송광사”
저도 여행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스트맨님 여행기 보고 있으려니 저도 다시 떠나고 싶네요. 사고 없이 무사히 좋은 풍경과 좋은 경험, 좋은 음식 많이 드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미 갔다 왔는디…
동원님께서는 여행을 정말 많이 하시네요..위에서부터 쭉~~감상 즐거웠네요.
너무 부럽군요..저도 한국이든 외국이든 여행을 넘 하고 싶은데
음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네요.
다람쥐인가요..청솔모인가요?
너무 귀여워요..~~
많이라기 보다 기록해서 그런 거 같아요.
남들처럼 다니는데 그냥 갈 때마다 기록을 하다 보니
많이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여독은 풀리셨겠죠?
오랜만입니다. 이스트맨 형님, 정말 구경 잘 했습니다.
저도 보성찻밭은 1년에 2~3번 가는 것 같습니다.
이때쯤이면 꼭 갑니다.
대한다원에 들러 삼나무숲을 지나 해풍이 기어올라오는 찻밭 구경하고
차향으로 온몸을 중독시킵니다.
그리고는 율포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횟집엘 갑니다.(도로쪽의 깔끔한 횟집들은…-_-;;;)
그곳 전어회와 전어 회무침으로 온몸에 퍼진 독을 약으로 변화시킵니다.
보성, 정말 꼭 가볼만한 곳이더라구요.
놀러간 건데 여독이랄께 있나요, 뭐.
보성엘 1년에 두세 번 간다면 그건 보통 호사가 아닌 걸요.
대한다원은 올라와서 얘기를 들었어요.
거길 꼭 들러야 하는 건데, 그곳을 빼먹다니…
다음을 기약해야지요, 뭐.
제 고향이 보성인데.. 보성에서 복내면을 거쳐 광주로 가는 길도 상당히 오래되었지요.
그 가로수는 아스팔트가 처음 깔린 1981년 그 해에 같이 심겨진 것들이죠..
그 때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처음 본 아스팔트 길이 신기해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던 기억이…
몇번 국도인지는 모르겠어요. 주암호수를 따라 가는 길도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많답니다.
보성은 보성만을 따라 해변도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뒤로하고 말았어요.
복내면을 기억해 두어야 겠네요.
18번 국도는 담양의 그 유명한 가로수길보다 나은 것 같았어요. 담양길도 저희가 가보았거든요.
이 블로그는 정말 유용하네요…
18번국도라..메모메모…
근데요…가만..하고 생각나는게….이스트맨님께서 부인되시는분과 그렇게 오래 여행하시면요….자녀분은 어떡해요..?
하긴 고등학생이니 자기가 다 알아서 할 수있는 나이지만…
^^;;;;ㅎㅎㅎ
18번 국도는 볼 것도 많아요.
주암호, 고인돌 공원 등을 끼고 있거든요.
어머니랑 같이 살아요.
아이 혼자만 남겨두고 가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죠.
그리고 그 핸펀이 있기 때문에 아침마다 전화로 깨울 수 있잖아요.
저녁 때도 수시로 집에 들어왔나 확인하고…
아이가 초등학교 때는 학교 빼먹고 같이 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따라 나서요.
아이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아주 대접을 잘해주거든요.
둘이만 다니면 오해도 좀 받고…
자꾸만 부부로 봐주질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