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

11월 20일, 승재씨와 연숙씨가 김포에서 재배한 배추 30포기를 가져다 주었다.
밭에서 뽑아다 가져다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아예 다듬어서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원래 그녀가 잡아놓은 김장의 일정은 12월 초순이었는데
승재씨가 가져다준 배추로 인하여 22일이 올해의 김장하는 날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씻고 무우의 채를 써는 것이 내 몫이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아파트에서는 처음 해보는 김장이다.
어머니가 어디선가 커다란 다라이를 빌려오셨다.
배추를 절이는 것은 그녀와 어머니의 몫.
나는 힘드는 일은 해도 비율을 맞춰야 하는
전문적인 일은 하나도 못한다.
배추를 절이는 일은 배추의 긴장을 없애는 일이다.
갓뽑아온 배추는 싱싱함이 그대로이다.
그녀는 그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 긴장을 풀어준다.
소금을 너무 많이 치면 긴장이 너무 제거되고
반대로 소금의 양이 모자라면 배추의 긴장을 없앨 수가 없다.
배추는 소금물 속에서 긴장을 풀고
노근해지는 몸의 이완을 짭짤하게 즐긴다.
예전에 마당에서 하던 일이 이번에는 베란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대로 할만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절인 배추를 물에 씻어내는 것이 내 몫이다.
말하자면 한해를 밭에서 자란 배추는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곧바로 잠에 든다.
때문에 그 배추를 깨워 말끔히 씻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적당히 이완된 배추가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심심하여
배추에게 배추의 꿈을 묻기로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배추는 우선 한라산이 되고 싶어했다.
불을 내뿜던 정상의 분화구를 비워두고
배추는 산이 되어 일어섰다.
배추 한라산에선 곧 맛의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그녀가 시장가면서 이것도 씻으라며 주고간 파 때문에
배추 한라산은 졸지에 격렬한 파의 폭발을 보여주며
여전히 산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화산재대신 파냄새가 솔솔 퍼졌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배추는 또 용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자 푸른 바구니가 하늘이 되어 주었고,
배추는 곧바로 푸른 갈기를 날리며 그 하늘을 날았다.
꼬리에선 일진광풍대신 물이 뚝뚝 떨어졌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배추가 용이 되어 날자
파는 이번에는 냉큼 용의 머리 위로 날아가
용의 뿔이 되어 주었다.
용배추가 되었으니 이번 배추는 효험이 남다를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그러나 배추 한라산도, 용배추도 모두 그녀 앞에선 김장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씻어놓은 배추를 마지막으로 다듬는다.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전설속의 설문대 할망이 따로 없다.
제주도대신 그녀는 오늘 김장을 담근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무우 녀석들 몇이 모여 수근거린다.
김장하는 날, 재미있게 보낼 무슨 수가 없을까.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무우 녀석들이 찾아낸 재미는 채칼 위에서 썰매타기.
썰매타기의 길이는 짧지만
둘이 타다 둘이 다 없어져도 모를 정도로
아주 재미나게 즐기셨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무우채는 말하자면 무우의 썰매타기가 남긴 즐거움이다.
사람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가 가죽을 남긴다면
썰매탄 무우는 무우채를 남긴다.
무우채는 갖은 양념과 야채로 버무려진 고춧가루 속으로 뛰어들어
배추의 속이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그녀는 능란한 솜씨로 배추의 속에 또 속을 채워주었다.
그러니까 배추는 김장할 때 이중의 속을 갖는다.
배추가 속속들이 맛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드디어 담근 김치가 김치통에 담기면서 김장이 끝났다.
그녀가 사이사이로 크게 썬 무우도 넣었다.
그러면 김치가 시원하단다.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김치에게서 맛을 슬쩍 나누어받은
무우의 맛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11월 22일 집에서

김장하는 날의 주인공은 김장같은데
이상하게 끝에 가서 만나는 돼지 편육과 한잔의 술이 주인공같다.
물론 그것을 빠뜨릴 순 없다.
김장은 한잔의 만찬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는 생태찌게까지 제공되었으나
역시 맛나기로는 노란 배추속에 말아먹는 삶은 돼지고기가 최고였다.

7 thoughts on “김장하는 날

  1. 와…김장 이야기 ㅋㅋ 그런데 어쩌면 그 와중에 그런 파로 장난스런
    사진을 찍으셨을까요? 그런 동원님은 짱이십니다요!
    아 맛있어 보여요
    어머…제가 빚은 그릇도 보이고..기분이 갑자기 더 좋아지네요 흐믓….^^

    1. 도토리님 그릇 때문에 우리 집 식탁의 품위가 한참 업글되었죠.
      전시회 하느라 고생많았어요.
      항상 들어보면 전시회가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덕분에 우리는 좋은 작품들 보긴 하지만요.

  2. forest님께서 아드님 데리고 김장하신 것 같아요.
    화산부터 용머리까지 아주 재미납니다..ㅋㅋ

    저희 깁장은 토요일에 하려고 날 잡았는데
    eastman님처럼 재미있는 분이 계시면 훨씬 일이 수월할듯 하네요.ㅎ

    맨 아래 사진에 껴안아 한잔 하고 싶습니다..^^

    1. 김장이 힘들긴 힘드나봐요.
      김장하고 오늘은 끙끙 앓아누우셨습니다.
      저번에 강화갈 때
      그찮아도 한번 얼굴봐야 하는데 하는 얘기는 했습니다.

    2. ohnglim님보다 먼저 저희가 김장을 했네요.^^

      요즘 제가 몸이 예전같이 않아 한 잔 하지 못하는게 가장 큰 흠.
      그래서 그런가 김장 후유증이 오늘은 심각.
      아무래도 낼부터는 완전 일모드인데 큰일 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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