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
얼굴보기가 어렵다고 해도
그대는 오늘도 집을 찾아왔군요.
그대는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냥 내가 사는 집의 근처를 서성이다 가는 것으로
나를 그대 속에 채워갈 수 있다고 했죠.
그런 날이면 만나지도 보지도 못하는 내가
그대의 기다림 속에서 놀다간다고 했어요.
일을 하고 있다 보면
창틈을 파고든 바람이
오늘도 찾아와 바깥을 서성이던 그대가
방금 돌아갔다고 전하곤 했어요.
그때면 급하게 베란다의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도 했지만
바람이 전한 그대의 기다림은
어디에도 흔적이 남아있질 않았죠.
일에 바쁜 나를 방해하지 말라는 그대의 만류에
그대가 왔었음을 전하는 바람의 전언은 언제나 늦기만 하죠.
오늘은 눈이 그대의 기다림을 전했어요.
문득 그대 생각이 고개를 들어 베란다로 나갔더니
그대의 기다림이 선명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어요.
눈과 함께 온 그대가 바깥을 서성이다 가면
내 마음엔 그대의 기다림이
불에 데인 듯한 시커멓고 진한 자국으로 남아요.
눈은 그대가 왔다갔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 기다림의 흔적을 내 마음 속으로 슬쩍 들이밀어 주었어요.
바람은 소식만 전하고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지우는데
눈은 그대의 기다림을 하얗게 덮기 전에
언제나 내게 알려주곤 해요.
눈이 오는 날 왔다간 그대가
오늘은 내 마음에 짙은 흔적으로 남았어요.
2 thoughts on “눈덮인 주차장의 흔적”
아름다운 CF 콘티를 읽는 기분입니다.
서성이던 기다림. 내다보던 아련한 반가움.
다시 해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행복입니다.
사실은 어린이집 차가 서는 자리인데..
그걸 슬쩍 지워버리고 나를 찾아온 누군가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선 가끔 내가 사는 아파트 창을 올려다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가는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눈이 퍼붓는 장면을 내려다 보다 건진 뜻밖의 수확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