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강변에 나무 십자가 하나 서 있다.
나무 십자가에 나무 예수가 못박혀 있다.
나는 물었다.
매일 오후 세 시면 사람들이 당신 앞에 모여
포클레인의 흉포한 개발 욕망 앞에 내몰린
이 나라의 강을 지켜야 한다며
그 마음을 모아 당신께 기도를 올리지만
알고보면 당신은 그냥 나무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나무 십자가가 반문했다.
그러면 너는 살덩이에 불과한 것인가.
네가 살덩이가 아니듯이
때로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며,
강이 그냥 강이 아니며,
또 바위 또한 그냥 바위가 아니다.
제주 강정의 구럼비 바위도
그냥 바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누군가의 말에
며칠 동안 속이 상했다.
마음의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뭐라고 딱 꼬집어 해줄 말도 생각나질 않았다.
상대가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노밖에 달리 아무 대거리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더 속이 상했다.
특별하게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믿음도 없지만
두물머리 강변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나무 십자가 앞에 섰고,
나무 예수에게 묻고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몇 푼의 돈에 팔려
뼈가 추려지고 살덩이로 도려내진 뒤
푸줏간에 고깃 덩어리로 걸릴 수 없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이듯이
나무 또한 그냥 나무가 아니라
때로 자연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 자리가 되며,
이 땅의 강은 그냥 강이 아니라 쉬지 않고 흘러
온갖 삶을 잉태하는 생명의 젖줄이며,
멀리 제주 강정의 구럼비 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삶이 서린 오랜 세월의 결정체란 것을.
이제 누군가가 강정의 구럼비 바위도 그냥 바위가 아니냐고 말한다면
나는 슬쩍 나무 예수의 반문을 빌려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살덩이인가 라고.
6 thoughts on “두물머리 강변의 나무 십자가 앞에서”
설령 자기들 어리석은 두 눈에 한갖 바위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그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때론 생명을 포기한 채 그 바위를 붙들고 울부짖는 것을 보면서 단 한 번도 ‘바위 이상의 무엇이길래?’를 한 번 쯤 생각은 안 해볼까요?
아…. 진짜! 영혼도 마음도 없는 살덩이로 밖에는 안 느껴지는 저들.
이 분노를 담아 생애 처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는 선거가 코 앞인데 요 며칠은 참 절망스럽기만 하네요.
양김이 다 나와서 실망스러웠던 어느 해의 대통령 선거가 생각난다는.. 그래도 절망하지 않으려구요. 지면 더 큰 승리가 기다릴 듯하고 이기면 이제 좀 숨쉬고 살아보라는 하늘의 뜻인가보다고 여기려구요.
위 글과 댓글을 다시 읽다보니…
동원님께 영성 깊은 신앙심이 느껴져요.
반면에 제가 비신자 같구요. ㅎㅎㅎ
방금 전 이정희대표 후보사퇴 기사가 뜨네요.
이게 어떻게 되어가는 일인지….ㅠㅠ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란 별별 형태로 다 나타나는 듯 싶어요.
가령 클라라님의 신앙은 커피를 통해 나타나는 것 같더라구요. 라리님의 커피도 보통 커피가 아니라 신앙이 육화된 형태가 아닐까 싶어지곤 했어요. 제가 신앙도 없으면서 믿는 분들을 만나는 건 신앙이 그렇게 체화되는 현장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예요.
반대의 경우도 많이 보았죠.
기도를 위해 모은 두 손에서 신앙이 아니라 로또를 한장 사고 그 당첨을 비는 욕망이나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공격적 방어 본능을 본 경우랄까. 물론 그런 분들은 다시는 안보지만요.
이정희는 아깝지만 멀리 봐야 할 듯 싶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삼아야 하니까.
어디서 이런 울림이 있는 자연신학이나 생태신학을 터득하셨단 말입니까?
미사에 늦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찍다가 오늘은 십자가 사진이라도 좀 찍어가자며 들렀는데 이런 답을 들었어요. 자세를 낮추고 좀 올려다보았더니 답을 주시더군요. 그래서 답을 얻으려면 자연에 대해서도 좀 자세를 낮추어야 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