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동에 살고 있지만
길 하나를 건너면 명일동이고
또 다른 길 하나를 건너면 암사동인 곳에 살고 있어
확연하게 구별되는 동네 이름과 달리
그 동네들과의 실제 거리는 그다지 멀지가 않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반경으로 치면
그 동네들도 모두 우리 동네이다.
그래서 가끔 걸어서 암사시장에 가고
명일시장을 찾는 빈도는 훨씬 잦다.
그리고 봄에 벚꽃이 피면
명일동의 삼익아파트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삼익아파트는 벌써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아파트를 지을 당시에 벚꽃과 각종 꽃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자라 이제는 봄마다 환상적인 꽃의 화원을 연출한다.
서울에서 벚꽃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여러 곳 있지만
나는 집에서 나가 걸어가면 10분의 시간밖에 요구하지 않는
명일동의 삼익아파트로 벚꽃 놀이를 간다.
올해도 몇 번 들렀다.
가지는 허공으로 길을 놓고
그러면 벚꽃이 그 길을 꽃으로 채운다.
벚꽃이 활짝 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벚꽃이 일제히 폭발한다.
벚꽃의 대폭발이다.
마치 용암이 쏟아지듯
벚꽃이 하얗게 분출한다.
벚꽃이 나무를 타고 간다.
정말 길로 아는 건가.
어디쯤 왔냐구?
왜 나뭇가지 굵은 삼거리 있잖아.
거기서 동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작은 가지 삼거리 있구.
그 작은 가지 삼거리 지나서
굵은 삼거리로 가고 있어.
제 모습을 볼 수 없는 벚꽃에게
저녁해가 벽에 그림자를 그려주었다.
벚꽃이 제 그림자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육사의 칠월은 청포도가 주절이주절이 열리는 계절이고
우리 동네 삼익아파트의 4월은 벚꽃 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계절이다.
벚꽃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벚꽃이 아파트의 창을 다 가리고 있었지만
조망권 해친다고 항의하는 주민은 하나도 없었다.
꽃이 앞을 가리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뒤를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꽃이 앞에 서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꽃만 보기 시작한다.
아파트 주민 여러분,
서울서 산다는 게 힘들죠?
그래도 봄마다 날 보는 재미에 살아요.
벚꽃이 햐얗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 그래도 아파트는 너무 숨막혀.
나는 푸른 하늘을 호흡할 거야.
벚꽃이 하늘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무 가지를 한쪽으로 넘기며 벚꽃춤을 추고
그 춤사위 밑에서 남자 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탄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여자 아이 하나가 강아지를 안고 끌고 지나간다.
하늘이 내민 푸른 도화지를 받자
벚꽃이 난치기 기법으로 벚꽃 그림을 그렸다.
견우와 직녀는 칠월칠석에 만나고
명일동 삼익아파트의 벚꽃은 4월에 드디어 서로 만난다.
1년만에 다시 만난 벚꽃의 대화는 온통 꽃의 대화였다.
벚꽃은 나를 버리고 가시려거든
가시는 걸음마다 눈처럼 깔아준 벚꽃을
즈려밟고 가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어디 진달래도 아닌 것이
그렇게 비장하게 나오냐며 무심하게 지나쳐 버렸다.
역시 비장은 진달래에게나 통하는 것이었다.
까치집이 온통 벚꽃에 묻혔다.
4월의 며칠간 꽃밭에서 사는 동안
까치도 기분이 좋을까.
명일동 주민 여러분,
오늘 삼익아파트 주차장에서
명일초등학교 벽면을 스크린 삼아 영화를 상영합니다.
영화 제목은 벚꽃의 봄입니다.
완전 포스트모던 영화라서
스토리도 별다른 등장 인물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벚꽃만 보여줍니다.
지나는 길에 한번씩 감상하고 가십시오.
가지끝의 불안이 두려운 너는
결국 나무의 허리를 붙잡고 자리를 잡았구나.
가지끝이 불안하긴 해도 바람과 노는 재미 또한 큰 법인데
너는 불안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나보다.
하긴 때로 무료할 정도의 안정처럼 편안한 것도 없지.
네가 편안해 보이긴 하는 구나.
그냥 그러면 된 거지 뭐.
벚꽃이 피자
차들이 모두 옆으로 도열하며
벚꽃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했다.
문명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알아보았다.
너도 나무 허리에 피었구나.
너를 보니 아무래도 벚꽃이 필 때 영어 단어를 외우며
나무 아래를 지나간 녀석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너는 그 녀석의 말에 가지끝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아마도 여기가 꽃피울 자리인가 보다고 여기며
나무 허리에서 꽃을 피우고 말았겠지.
제발 벚나무 밑에서
영어 단어 hurry는 외우지 말자.
벚꽃이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못해줘도
아파트 가득 꽃의 마음은 채워줄께.
그러니 올해도 꽃의 마음으로 예쁘게들 사세요.
2 thoughts on “명일동 삼익아파트의 벚꽃 놀이”
동네의 품격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명물인 것 같습니다.
저희집에서 검단산 가다 보면 나오는 산곡천에도 벚꽃 터널이 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으는데, 삽십 년 더 지난 이 아파트 벚꽃들에는 훨 못 미치네요.
여기저기 접근성이 뛰어난, 정말 좋은 동네 사시는 것 같습니다.
벚꽃축제도 하는데 올해는 안하더군요.
해보니 너무 시끄러웠나 봐요.
하긴 축제란 것이 술판이니.
하여간 이곳의 벚꽃 하나는 어디 벚꽃도 부럽지 않은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