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힘

Photo by Kim Dong Won

예정에 없이 나섰던 걸음이
충주댐까지 이어졌다.
충주댐을 맴돌다가 나오는 길에 식당에 들렀다.
박속낙지전골을 시켰는데 낙지가 빠지는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오래 간만에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를 안 것이 대학 때였으니까
인연의 고리를 그 시작부터 늘어놓으면 25년은 훌쩍 넘기고도 남을 일이다.
결혼하여 아이낳고 함께 살아온 세월도 이제 15년은 넘긴 것 같다.
지난 해 새로 카메라를 사고 나서 나는 많은 시간을 혼자 돌아다녔다.
그동안의 나는 항상 어디를 갈 때나 거의 예외없이 그녀와 묶여있었다.
우리는 같은 방을 쓸 뿐만 아니라
같은 사무실을 썼고,
심지어 거래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둘이 함께 였다.
그렇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지겹도록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나는 정말 많은 시간을 홀로 여행을 하며 돌아다녔다.
올해초까지 이어진 나의 홀로 여행은 실로 오래 간만에 누려본 혼자의 시간이었다.
그 혼자의 시간은 나로 하여금
이제 내가 그녀 없이 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잠시 가까운 곳으로 동행할 때마다 둘이 심하게 다투었고,
같이있다는 것이 자꾸 숨을 막았다.
아마도 그녀를 세상의 방어벽으로 삼아
평생을 그녀의 치마폭 속에서 뒹굴며 살아보려다
결국은 세상에 던져지게된 내 삶의 불안이 그런 갈등을 빚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불안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내게 갖고 있던 소중한 의미 하나를 까마득하게 잊어가고 있었다.
내게 있어 그녀는 내가 세상에 눈뜰 때
항상 내 곁을 함께 하는 존재의 힘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세상이 달리 보이는 신비로운 경험이.
처음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그렇게 내가 세상에 눈뜰 때 내 곁에 있었고,
나에게 그것은 존재의 힘이었으며,
아울러 그것이 나에겐 사랑이었다.
그 기억이 희석되어 멀리 밀려나고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이제 홀로 세상에 눈뜨고 있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있어 이제부터 나도 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백담사를, 영주의 부석사를, 부여의 궁남지를 카메라에 담아갔고 오면서 세상을 다시금 재편하고 있었고,
그렇게 세상에 눈뜨는 그 시간에 이제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그건 한편으로 슬픈 일이었다.
존재의 힘이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내게 있어 사랑이 사라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홀로 살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그녀의 사랑없이 살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여행길에서 마음을 홀가분하게 털어내면서
한편으로 또 나는 슬펐다.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5월초의 어느 날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던 그 존재의 힘을 다시 되찾았다.
그 날 그녀와 나는 춘천으로 나선 여행길에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양수리를 지나갈 때 차속에서 거리의 가로수를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었고
그러면서 오늘의 주제를 “초록의 만찬”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내내 곳곳에서 초록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항상 그 계절이면 지천이던 초록이었지만
한번도 그 초록에 눈뜨지 못했던 나는
그 날따라 초록에 눈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그녀가 내 곁에 있었다.
사랑이란 가슴 설레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일상에 묻혀 희석되고 빛이 바랜다.
그러나 어느날 이제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라는 포기와 습관의 무게에 짓눌려 이제는 아득한 전설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올해 5월의 어느 날 그렇게 다시 사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 난 신록에 눈떴고, 그녀는 내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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