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의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그 중 한가지는 시집들이고, 다른 한가지는 컴퓨터 책들이다. 그러나 그 둘이 그렇게 한 책꽂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있어도 그 풍경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 느낌은 어색하기만 하다. 그 둘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화해없이 각자의 길을 갈 것 같았던 그 둘이 어쩌다 나의 책꽂이 속에선 함께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사실 나는 컴퓨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때의 내 성적 중에서 가장 좋은 학점으로 남아있는 것이 전산개론이다. 반대로 나는 들어야할 의무도 없는 문학개론을 스스로 선택하여 열심히 들었지만 학점은 별로 좋질 않았다. 좋은 성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컴퓨터 앞에선 항상 무엇인가 두려웠고, 문학 앞에선 마음이 편했다. 그 둘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내가 처음으로 애플에서 내놓은 LCII라는 컴퓨터를 구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LCII와 일주일 동안 씨름을 하고 난 뒤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가졌던 컴퓨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털어버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명과 화해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뒤로 시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시는 여전히 나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가 내게 안겨준 가장 큰 즐거움은 정보의 즐거움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정보를 많이, 그리고 빨리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정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일기 예보이다. 일기 예보는 보통 내일의 날씨를 오늘 알려준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예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내가 내일까지만 기다리면 맞는지 안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보는 그렇듯 그것의 진리성, 좀더 쉽게 말하여 해당 정보가 맞는지 안맞는지의 여부를 내일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보가 좀더 전망치를 좀더 길게 내놓는다고 해도 나는 일주일이나 한달, 또는 1년만 지나치면 그 일기예보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보란 모두가 그렇다. 바로 내 자신이 그 진리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때문에 그것이 틀리는 것인지 맞는 것인지를 내 스스로 알 수 있다.
컴퓨터는 마치 일기 예보처럼 나에게 다가섰다. 갑자기 잘 돌아가던 프로그램 하나가 어느날 작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일단 그 프로그램이 문제일 것이라고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새로 깐다. 내가 세운 가설적 정보는 금방 그 진리성이 확인된다. 나는 이제 정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확인하기까지 한다. 일기예보의 경우 나는 그냥 정보의 수혜자나 확인자였지만 컴퓨터의 경우에 나는 정보의 생산자를 겸하면서 또다른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도 안되기는 마찬가지일 때가 빈번하게 생긴다. 결국 프로그램에 이상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나는 시스템을 밀어버리고 새로 깐다. 이제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시스템이 문제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어 추가적인 조절판과 확장 파일을 시스템 속에 집어 넣는다. 갑자기 프로그램이 다시 멈춘다. 결국 나는 문제의 원인이 추가적인 조절판이나 확장파일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구체적으로 그 원인은 액션 유틸리티라는 조절판이었다. 그건 내가 서너 시간의 노고를 받쳐 스스로 캐낸 정보였다.
다른 기계 문명과 달리 컴퓨터는 그 시스템을 내가 스스로 관장할 수 있어 나는 종종 그런 식으로 정보를 캐내고, 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정보 욕구와 그것에 대한 확인 욕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자동차를 분해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며 냉장고를 뜯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컴퓨터는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접근성이 매우 용이하여 언제든지 시스템을 열어보거나 새로 설치할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컴퓨터는 나에게 엄청난 정보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렇듯 금방 확인이 가능한 정보적 진리와 양상을 완전히 달리하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일기예보는 진리치 1의 형태를 취한다. 즉 일기예보가 “비가 올 것이니라”라는 예언적 형식을 띈다. 그 순간 일기예보는 틀릴 수가 없다. 언젠가는 비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종교적 잠언들은 모두 진리치 1의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종교적 잠언은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종교적 잠언을 정보로 혼동하는 순간 일기예보와 같이 언제 세상이 망하고 메시아가 새롭게 도래하는지 구체적 시점을 못박으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종교적 잠언이 정보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세기말에 세상의 종언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그 떠들썩한 소동들도 알고 보면 진리치 1의 잠언을 일반 정보로 오인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겐 왜 이렇듯 맞고 틀리고를 스스로 확인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진리치 1의 세계가 필요로 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정보만으로 꾸려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일 그 진리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진리치 0.5의 정보들은 나에게 스스로 진리를 확인할수 있는 열쇠를 쥐어주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정보의 진리 확인에서 큰 기쁨이나 깊은 만족을 구하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컴퓨터에서 많은 정보를 양산하고 기쁨을 누린다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깊은 만족을 줄 것이며, 또 일기 예보가 맞았다고 하여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일의 날씨에 대해 환호할 것인가. 일기 예보 시간에 “비가 올 것이니라”라는 모호한 예보가 나왔다면 모든 사람들이, 뭐, 저따위 예보가 다 있느냐고 한마디씩 하며 분통을 터뜨리겠지만 실제로 삶의 예보에서 그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면 가뭄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오늘의 목마름을 잊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 말의 예언에 감격해하고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겐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 하나는 정보의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시적 잠언의 즐거움이다. 전자의 진리치가 우리에게 진리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면, 후자는 맞고 틀림을 확인해야 하는 성격의 세계가 아니다. 시는 그냥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옳고 그름에 의해 그것의 진리성이 검증되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으로 걸음했을 때 마음이 편안하거나 혹은 만족감이 깊은 여러 가지 문화 유형 중 하나이다. 시와 컴퓨터, 그 둘은 하나만으로는 절름발이와 같아서 어느 것도 완전할 수가 없다. 완전을 기하려면 그 둘을 동시에 취하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책꽂이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의 책이 나란히 꽂혀 있다. 바로 시와 컴퓨터의 책들이다. 그 둘은 그렇게 나란히 균형있게 꽂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둘이 공존해야 우리의 삶이 균형을 갖출 수 있다. 세상이 정보의 홍수 속에 떠밀리는 오늘날, 한편으로 시에 대한 갈증이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시 또한 그 목소리 속에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을 담을 때면 그 문명과 화해하기 보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양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루 빨리 그 둘의 공존이 자연스러운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