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
꽃은 주둥이를 길게 내밀면서 내게로 왔다.
주둥이를 길게 내밀고 있길레
나는 처음에는 무슨 할 얘기가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내 귓가에 무슨 비밀 얘기를 속삭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마릴리스는 그냥 입만 내민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말이 없길레 나는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분명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아마릴리스는 손가락으로 턱만 긁적일 뿐,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싶은 자가 입을 닫고 있으면
그 닫힌 입을 앞에 둔 자가 답답해진다.
그러나 말을 참으면 그 말들은 입안에서 부풀어 오른다.
금방이라도 말이 터져 나올 듯이 아마릴리스의 입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가 답답하여 미칠 지경에 이르자
드디어 아마릴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열었는데도 아마릴리스의 얘기는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고?
나는 어렵게 입을 연 아마릴리스에게
뭐라고 뭐라고만 자꾸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마릴리스는 진득하게 얘기를 반복했으나
꽃의 얘기는 하나도 내 귀에 들리질 않았다.
이제는 아마릴리스가 서서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꽃이 찢어지도록 입을 벌려 고함을 치기에 이르렀다.
목젖이 튀어나올 정도로 엄청난 고함이었다.
붉은 고함이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꽃의 얘기를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아마릴리스는 이제는
목젖이 갈라지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귀청을 뚫고 들어올듯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여전히 꽃의 얘기를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얘기를 털어놓은 꽃에게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답답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답답했으나
아마릴리스가 입을 연 뒤로 답답해지고 있는 것은 아마릴리스였다.
아마릴리스는 곧바로 풀이 죽어 버렸다.
아마릴리스가 어렵게 말문을 열 때 꽃이 핀다.
그 얘기가 고함이 될 때 꽃은 드디어 활짝 열린다.
그리고 내가 그 얘기를 알아듣지 못할 때
아마릴리스는 풀이 죽고 꽃은 지고 만다.
내가 얘기를 잘 알아들었다면
아마릴리스의 꽃은 지는 법이 없었을 것이다.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 때문에
어렵게 핀 세상의 꽃들이 진다.
세상의 꽃들이 지는 것은
우리들이 꽃들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세상 꽃들을 풀죽이고 있다.
2 thoughts on “말의 욕망과 들리지 않는 말 – 아마릴리스 시리즈 5”
꽃을 피어나게 할 수는 없어도 지게는 할 수 있는 게 우리인 모양입니다.
꽃이 너무 서둘러 지지 않도록 꽃의 속삭임과 외침에 종긋 귀를 열어두고
눈은 부지런히 관찰을 멈추지 말아야 하겠네요.
털보님은 아마 아마릴리스 왕국의 홍보대사쯤 되실듯.^^
아마릴리스 홍보는 오늘까지만 하려구요.
내년에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 꽃필 때쯤 무슨 말인가 들려주면 그저 감사할 듯 싶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