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배 한 척이 버려져 있었다.
배는 부실해서 바닥이 한겹 뜯겨져 나간 상태였다.
다시 물로 나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버려진 배가 누구에게는 오히려 기회.
흙이 냉큼 배 위로 올라
풀들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를 했다.
“자, 자, 한 자리에 묶여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풀들 여러분,
세상을 원없이 떠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어요.
바로 이 배를 타는 거예요.
이 배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풀들을 위한 특급 좌석을 갖추었습니다.
그냥 배에 타시고 땅에서 지내듯 뿌리 내리시면 됩니다.
좌석 대신 이상적으로 영양분을 배합하여
그냥 뿌리를 들이밀기만 하면 뿌리가 녹을 듯 맛난
최고급 흙을 깔았거든요.
그냥 땅과 진배없이 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자리에 묶인 여러분의 삶이 슬프거나 노엽거든
어서 빨리 이 배에 올라타세요.
그럼 배가 여러분을 싣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세상을 모두 구경시켜 드립니다.
시간 맞춰 물을 뿌려드릴 예정이니
뿌리의 갈증은 아무 걱정 마시구요.
요금은 후불제입니다.
가을되어 세상 뜰 때 그 몸 우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흙의 호객 행위는 완전히 통했다.
풀들이 올라타 자리를 잡았고
어떤 풀은 여행에 들떠
타이타닉호의 사랑 포즈를 잡아 보겠다며
아예 뱃머리로 나섰다.
우리는 안되겠냐며 뒤쪽에서 여전히 줄을 서는 풀들이 있었고
슬쩍 옆으로 올라타려다 들켜서
뱃전을 넘보는 것으로 헛물만 켠 풀들도 있었다.
그러나 풀들이 타고 나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배는 강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풀들이 도대체 왜 배가 가질 않냐고 성화였지만
배에 탓으면 이제 다 그만이라는 듯
배째라고 나오고 있었고
폭염의 햇볕이 그럼 그 배좀 째야 겠다는 듯
배를 쩍쩍 갈라놓고 있었다.
흙이라고 풀들을 악착같이 속일 생각이야 있었으랴.
어쩌다 배에 태우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밀어닥친 가뭄이 원수가 되었으리라.
흙이나 풀이나 모두 비가 아쉬운 시절이 흐르고 있었다.
2 thoughts on “배와 흙, 그리고 풀”
산색이며 물색에 빈배까지, 그림 좋다 했는데, 빈 배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바닥을 한 겹 뜯어내 나란히 놓은 건 처음 봐요.
버려진 배 주변으로 무성하게 풀이 난 경우는 봤는데 이렇게 흙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처음 봤어요. 아마도 홍수났을 때 물에 잠긴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전철에서 내려 아무 동네나 돌아다니니 사진찍을만한 것들이 있는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