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 전철 속의 젊은 연인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6월 20일 경춘 전철의 창밖 풍경


1. 춘천가서 사진 찍다 돌아오는 길.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찍질 못했다.
그 장면은 돌아오는 전철에서 바로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젊은 연인이 선물했다.
이제 갓 학교에 들어갔음직한
대학 신입생 정도되지 않을까 짐작이 되었다.
얼굴만으로 보면 여자애가 좀더 나이가 많아 보였고
남자애는 아주 어려보였다.
그냥 찍고 볼까 하는 생각에 카메라를 만지작거렸고
둘의 반응을 살펴볼 양으로
전철의 창가에 대고 셔터를 눌러보았으나
둘은 셔터 소리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찍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가 지금의 장면이 흩어지면
그건 더 큰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세밀하게 머리 속에 새겼다.

2. 처음엔 남자애가 여자애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어깨에 기대어 있다기 보다
여자애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은 듯 싶기도 했다.
머리가 거의 90도 각도로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피로가 깊었는지
여자애의 입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피로는 몸을 흩어놓는다.
그러나 여자애의 앉은 자세는 아주 반듯했다.
그렇다.
사랑이란 네가 기댈 때,
네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3. 누가 앞에서 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일까.
남자애가 눈을 떴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내 웃음은 남자애의 하루끝에 몰려든 피로 앞에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고 지워졌다.
그래도 남자애는 여자애의 어깨에 기대어 조는 자신의 모습이
앞의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여자애의 어깨에 기대지는 않았다.
남자애는 양팔을 서로 엮어 받침대를 만들고는
무릎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애가 기대어 있을 때는 반듯한 자세로 졸고 있던 여자애가
갑자기 남자애가 지워버린 텅빈 공간쪽으로 기우뚱하고 흔들린 것이다.
여자애의 몸은 기울어졌다 급하게 세웠다를 불안하게 몇 번 반복했다.
그렇다.
사랑이란 내게 기대었던 네가 없으면
그때부터 중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4. 남자애의 상반신이 있던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급하게 세웠다를 반복하던 여자애도 눈을 떴다.
남자애가 무릎쪽으로 몸을 숙이고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여자애도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똑같은 자세로 자기 시작했다.
둘의 머리가 맞닿았다.
잠시후 유난히 심하게 흔들린다 싶었던 전철의 요동에
둘의 머리카락이 뒤섞였다.
마치 그들의 꿈이 서로 뒤섞이는 듯했다.
꿈마저 뒤섞이는 달콤한 잠이 세상에 어디에 있으랴.
그렇다.
사랑은 잠을 자면서도
서로의 꿈 속으로 쓸려 들어가 서로 뒤섞이는 것이다.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둘이 그냥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카락 뒤에서 서로의 한손을 꼭 잡고 있다는 것을.
둘은 잠을 자면서도 풀어지지 않는 사이였다.

5. 둘의 불편한 자세는 오래가질 못했다.
결국 둘 모두 몸을 세우더니
이번에는 여자애가 남자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애는 남자애쪽으로 60도 정도 머리가 기울었고
남자애는 여자애쪽으로 15도 정도 고개가 기울었다.
여자애의 머리는 곡선이다.
남자애의 목선도 곡선이다.
머리의 곡선은 목선이 그려내는 곡선 속으로 들어가 겹쳐졌다.
우리의 몸이 곡선인 것은 서로 기댈 때
빈틈없이 곡선을 맞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기울어져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렇다.
사랑은 서로에게 빈틈없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6. 서울까지 오는 동안 바로 앞에서 졸고 있던 젊은 연인에게서
자그마치 네 가지의 사랑을 보았다.
알고 있었을까.
졸면서 사랑으로 전철안을 물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7. 다음에는 졸면서도 사랑을 보여주는 젊은 연인을 만나면
아이팟을 꺼내 전광판 앱의 글자로 사진을 찍겠다고 조용히 알리고
일단 사진을 찍을 생각이다.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전광판 앱의 글자를
I will take your picture. OK? 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오늘 보았던 장면은
언젠가 좋은 모델을 구해서 다시 재현하고야 말겠다.
이번에는 그들의 사진은 찍지 않고
애꿎게 창밖의 풍경만 몇 장 찍었다.

2 thoughts on “경춘 전철 속의 젊은 연인

  1. 때론 사진 없는 장면 묘사가 더 사실적인 경우가 있지요. 젊은 연인들을 보여
    주셨어도 재밌었겠지만, 오늘은 문자 중계가 더 실감나는데요.^^
    전광판 앱 글자는 일단 찍기 전에 예의상 그냥 보여주기만 하는 건가요?

    1. 아마도 그 문구가 지나가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을까 하는게 저의 생각이예요. 카메라와 렌즈의 위용 때문에 다들 거절은 안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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