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속에서 몸을 꺼내 아이가 걸어간다 – 이원의 시 「의자와 노랑 사이에서」를 읽다가

Photo by Kim Dong Won
2012년 11월 15일 우리 집 베란다에서

시는 처음에는 그냥 텍스트이다.
종이 위에 새겨져 있는 글자에 불과할 뿐이다.

색 속에서 몸을 꺼내 새들이 날아갔다
—이원, 「의자와 노랑 사이에서」 부분

그러나 그 텍스트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인이 “색 속에서”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텍스트가 자극한 상상력 속에서
단풍이 든 가을나무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꺼내 새들이 날아갔다”는 텍스트를 접했을 때는
이제 그 단풍든 나무 속에서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텍스트는 글자로 머물지 않고
내 머리 속에서 그림이 되지만
그림이 되는 동시에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텍스트,
즉 단풍든 나무 속에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텍스트와는 작별을 고한다.
시인의 텍스트가 그려주는 그림은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언어를 버리고
“색 속에서 몸을 꺼내 새들이 날아갔다”라는 텍스트와
새롭게 결합한다.
텍스트만으로만 시를 이해하려 들면 시는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
그 난해함을 해결하고 좀더 쉽게 시와 친숙해지는 방법이
바로 그 텍스트를 내세워 부를 수 있을 만한 그림을
머릿속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의 텍스트는 내게 그림을 불러다 주며
그 그림은 우리들이 익히 보던 풍경이긴 하지만
이제는 시의 텍스트와 새롭게 결합하고
그 결합은 익숙하던 그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해준다.
바로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점은 현실 속에서 그 텍스트의 확장을 경험할 때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베란다에 서면
바로 아래쪽으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단풍이 아주 곱게 들었다가 요즘 점점 더 빈가지를 늘려가며
가을과의 작별 의식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절반 정도가 남아 있으며
저녁빛이라도 그 위에 얹혀지면 말할 수 없이 색이 곱다.
그런데 사람들이 곧잘 이 밑을 지나가며
나무 밑으로 가려졌다 나타나곤 한다.
오늘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 아이 하나가 그 밑을 지나갔다.
나무 밑을 들어간 아이가 느티나무 밑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곳에 시의 텍스트가 있었다.
나는 그 텍스트를
“색 속에서 몸을 꺼내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다”고 읽고 있었다.
시인의 텍스트가 시집을 뛰쳐나와 내 머릿속 잠시 둥지를 틀고 지내더니
어느새 우리 아파트 아래쪽의 거리로 내려가 있었다.
시의 텍스트들은 곧잘 이렇게 세상으로 뛰쳐나간다.
시를 읽고 난 뒤에 경험하게 되는 가장 놀라운 순간이다.

**인용된 싯구절이 포함된 시는 다음 시집에 실려 있다.
이원,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12

2 thoughts on “색 속에서 몸을 꺼내 아이가 걸어간다 – 이원의 시 「의자와 노랑 사이에서」를 읽다가

  1. 시인과 평론가의 문학적 감흥과 상상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새벽에
    사진 보면서 단풍 든 느티나무가 아니라 아파트에 불이 난 줄 알았습니다.^^

    1. 베란다 유리창을 열지 않고 보면 그다지 예쁘질 않은데 창을 열고 내려다보면 아주 예쁩니다.
      살고 계신 곳은 워낙 나무가 많아 볼만한 것들이 더욱 많을 듯 싶습니다.
      가을이 오는가 싶었는데 가버렸는데 그래도 단풍 특집을 한번 하던가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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