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오랜 여행으로부터 딸이 돌아왔다.
미국의 뉴욕과 영국의 런던,
벨기에의 브뤼셀과 브뤼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 로마를 거치는
한달여의 여행이었다.
돌아온 딸이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은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보여준 환한 웃음이다.
하지만 선물이 그것으로 그치진 않았다.
큰 선물에 곁들여 몇 가지 작은 선물을 함께 받았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산 지갑.
원래 누가 공짜로 주어서 요긴하게 쓰고 있던 지갑이 있었는데
지난 해에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여행 중에 그것을 기억해 냈나 보다.
사실 이탈리아제 가죽 지갑을 한번 구경하고 싶기는 했었다.
그것은 와인 설명을 들을 때
향에 대한 설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탈리아제 가죽의 향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지갑을 받고 향을 가장 먼저 맡아 보았다.
이런 향이라면
내 취향의 와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비슷한 향을 좀 엷게 희석시키고
거기에 약간의 달콤함을 가미한다면
내가 맡아보았던 와인의 향이 날 듯도 싶었다.
지갑에 새겨진 문양은
피렌체란 도시의 문장(Coats of arms)이라고 한다.
지갑이 들어있었던 상자.
종이로 만든 상자이다.
겉에 그려진 그림 중에서 하나를 찍고
그 다음에 상자를 열면 펑소리와 함께
내가 찍은 것이 나타나는 요술 상자가 아닐까 했었다.
물론 내가 찍은 것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였다.
그러나 내가 상자를 열었을 때
그속에서 나온 것은 비너스가 아니라 작은 지갑이었다.
그렇다고 급실망하여 비너스를 찾아보겠다며
지갑을 여기저기 뒤지진 않았다.
잃어버린 지갑은 이제 다른 지갑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워주었는데
언제든지 반겨줄 요량이 되어 있는 비너스는 이번에는 불발이었다.
런던에서 샀다는 기네스 양말.
무슨 뜬금없는 양말 선물이냐 싶을 것이다.
양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 최고의 아빠”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딸이 선물한 것은 사실 양말이 아니라 그 문구이다.
나도 그 문구를 선물로 챙기고는 기분이 좋아서
선물 생각을 할 때마다 예외없이 한번씩 웃게 되었다.
기네스 병따개.
원래 집에 병따개가 아주 많았었다.
동네의 치킨집에서 개업 기념 등등으로 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하면서 그 병따개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가끔 병맥주를 사다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병따개가 없어서 조금 불편했었다.
딸이 이번에 그 불편을 해소시켜 주었다.
병따개엔 기네스가 전통적 방법으로 발효시킨 맥주라는 문구와
맥주를 처음 만들어낸 1759년이란 년도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있는 하프 모양의 문양은 기네스의 전통 로고가 아닌가 싶다.
병따개를 장만했으니 이제 순서로 보면 맥주를 사올 차례이다.
사람들에 따라선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원래 맥주 다음에 병따개를 마련하는 거 아냐?
아니다.
병따개 없이 맥주병만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고문이다.
차라리 병따개만 있고 맥주가 없는 편이 낫다.
따라서 일단 병따개를 먼저 장만해야 한다.
병따개가 마련되었으므로 곧 정해진 식순에 따라
다섯 명을 채워 만원을 받는 맥주를 사갖고 들어올 생각이다.
병따개의 뒷면.
뒷면에는 병따개의 눈이 있었다.
이 눈은 사람을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자석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철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저절로 이 병따개의 눈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
윙즈 에드몬이란 글귀가 눈에 띄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내가 받은 선물이고 다음은 그녀가 받은 선물이다.
모카포트라 불리는 개인용 에스프레소 기계.
말하자면 집에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기계이다.
생긴 것이 앙증맞아 처음에는 그냥
장식용의 미니어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실제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사용법은 간단해서 아래쪽에 물을 채우고
가운데 원두를 갈아 넣은 뒤 가스불에 올려놓고 끓이면
맨 위쪽으로 에스프레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사온 원두 커피 한 봉지.
이탈리아어를 전혀 몰라
봉지에 적힌 글귀들은 알 수가 없었으나
구글 번역기에 기대본 결과
로마의 판테온 신전 근처에 있는 커피의 고향이
이 커피를 만든 회사의 이름이 아닐까 싶었고
커피의 이름은 커피의 여왕(Queen of Coffee)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번역기 돌리다 카사라는 말이 고향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딸은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데
그래도 우리 둘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선물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선물이 나의 결핍을 메꾸어 주었다.
두 개의 선물이 잃어버린 것들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아울러 내가 다른 무엇보다 텍스트의 존재란 것도 알고 있는 듯하다.
딸은 양말을 통해 내게 텍스트를 들고 왔다.
내 존재를 알아준다는 것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선물로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왔다.
커피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기호 식품의 하나이다.
아니, 그녀의 경우에도 에스프레소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없는 현실적 결핍을 생각한 것이니
넓게 보면 그녀의 경우에도 결핍을 메꾸어준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딸의 덕택에 결핍이 몇 가지 메꾸어졌다.
삶이 이렇게 하여 충만해지고 그러는가 보다.
8 thoughts on “딸에게서 받은 선물”
두 분이 오매불망하시던 문지양이 환한 미소와 함께 돌아왔군요.
파란색 여행 가방에 붙은 스티커들이 세련되고 익숙한 여행자라는 걸 보여주네요.
선물 구경은 언제나 즐겁네요.^^
이번 선물이 그동안 받았던 선물 가운데서 가장 재미나네요.
주로 먹는 것이나 마실 것은 사왔는데
이번 선물은 쭈욱 같이 지낼 수 있는 것들이어서 더욱 좋습니다. ^^
아빠의 행복한 미소가 한달은 갈거 같은데요.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따뜻한 선물들이예요.
저 이태리 에스프레소 머신은 티비에서 어느 이태리 남자가 매일아침
사용하는거 보고 ‘아 이거다!’ 했었는데 사용후기 들어보고 장만해야겠네요.
울딸도 베네치아를 최고라 했었답니다^^
일 때문에 출근하고 있는 그녀가
하루 종일 딸과 함께 있다고 제가 부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ㅋㅋ
베네치아의 매력이 저희 딸의 개인적 취향이 아니군요.
양말이 아니라 문구..
아 좋네요 정말 좋아요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했더니 주저없이 베네치아를 꼽더라는.
월드 베스트 데디..이게 제일 큰 선물이군요..
최고의아빠라는 찬사는 그간 살아오시면서 ..얼마나 사랑을 많이 담아 주었는지 직접적인 표현인데요…..
저도 최고의 아빠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네요..병따게는 마치 훈장 같네요 ㅎㅎㅎ
고리 만들어서 가슴에 걸고 다녀볼까요? ㅋㅋ
맥주 마실 때 유용한 병따개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