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흰물결을 일으키다 – 가평 유명산

유명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억새를 만났다.
그렇다고 유명산에서 만난 것이 억새가 전부는 아니다.
모든 산이 그렇듯이 우리는 산에 가면 많은 것을 만난다.
가을엔 단풍도 그 길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얼굴 가운데 하나이다.
10월 28일 토요일, 유명산을 오르고 내릴 때,
그 길에서 억새와 마주하고, 또 단풍을 만났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뭇잎은 나무에 달려있을 때는 나뭇잎이지만
계곡의 물로 내려앉으면 나뭇잎배가 된다.
그 배는 가을엔 가을빛은 가득담아
계곡 아래쪽 사람들에게 산 위쪽의 가을을 배달한다.
사람들은 나뭇잎배가 싣고온 산 위의 가을이 궁금하여
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hoto by Kim Dong Won

단풍을 주워 책갈피 사이에 끼워놓던 시절이 있었다.
몇년 뒤 우연찮게 책을 뒤지다 단풍잎이 나오면
그 날은 책갈피에서 가을이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단풍잎 하나를 주워보았다.
노란 가을이 내 손바닥 위로 냉큼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아직 연두빛 나뭇잎도 있다.
그래도 느낌은 가을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가 우거지면
키가 작은 나무는 빛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무성한 가지 사이를 제치고
종종 빛이 단풍잎을 찾아든다.
단풍잎이 갑자기 얼굴빛이 환해졌다.

Photo by Kim Dong Won

빛이 들 때 단풍의 뒤쪽으로 몸을 낮추었더니
단풍이 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빛을 가득 머금으면 단풍은 투명해 보인다.
앞쪽으로 가보았더니 투명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끔 단풍의 몸을 투명한 빛깔로 감상하고 싶다면
단풍의 뒤로 낮게 몸을 낮추고
그 몸이 빛을 가득 머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딸랑딸랑 소리내지 않을 테니
절대로 흔들지 마시라.

Photo by Kim Dong Won

숲은 막힌 듯 하면서도 트여있다.
가을엔 좀더 멀리까지 시선이 트인다.
나무는 마치 손을 펼치듯 나뭇잎을 펼쳐들고 우리의 시야를 막다가
가을엔 슬쩍 나뭇잎을 모두 거두어 들인다.
가을이 오면 손이 시려서 나무도 어쩔 수가 없다.

Photo by Kim Dong Won

유명산 정상의 억새밭에 앉으면
그곳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안뜰이 된다.
억새로 하얗게 담장을 두른 예쁘장한 뜰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솜사탕 아니니 따먹지 마시라.
하지만 솜사탕일지도 모른다.
억새밭 앞에서 사진찍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 솜사탕이라도 먹은 듯 달콤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억새는 솜사탕일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람이 불자 억새는 흰물결이 되었다.
쏴아, 산 위로 물결이 쳤다 뒤로 물러나곤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단풍잎 하나가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왜냐구?
더 붉어지고 싶어서.
물에 젖으면 색은 더욱 진해진다.
그래서 붉은 색도 더 붉어 보인다.

Photo by Kim Dong Won

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에 가지 않겠다.
난 가을엔 단풍을 만나기 위해 산에 가겠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르르,
때로 단풍은 미끄럼처럼 가지를 타고
별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8 thoughts on “억새가 흰물결을 일으키다 – 가평 유명산

  1. 좋은글에 머물다갑니다…내고향 유명산에 다녀오셨군요
    제가만든 아름다운 유명산 놰가 있는데 필요하시면 보내드리지요

  2. 요즘 저 견딜 수 없이 무척 아픈 가슴인데
    이곳에서 억새랑, 가을 낙엽이랑, 고운 단풍이랑, 마주하니, 동원님 좋은 글들..위안이 됩니다.
    마음이 조금 감사르……

    1. 마음이 아플 때는
      사람들 위로의 말보다
      그냥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듣는 파도소리나
      산을 오르며 듣는 바람소리 같은게
      더 큰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자연이란 그거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많이들어요.
      힘 내시길.

  3. 예쁜 단풍을 보려면 무조건 높은 산을 찾아야하나봐요.
    제가 갔던 하동지역만해도 단풍이 하나도 없어서
    쌍계사 오르는 내내 진초록빛이었으니.^^

    근데요.. 김동원님은 저 억새밭에서 키스해보셨어요?
    갑자기 억새밭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키스하면 더 달콤할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ㅋㅋ

    1. 억새밭에선 해본 적이 없고,
      유명산 근처에 소리산이라고 있는데
      그 산에 갔을 때 중턱에서 한번 해본 적은 있죠.
      그건 좀더 달콤했던 것 같기도 하구…
      언제 한번 나만 아는 내 고향의 억새밭에 가보던가 해야겠어요.
      알려진데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디 대놓고 해볼 수가 있나요.

  4. 유명산에 남동생이 오프로드한다고 따라갔다가 올라가는 내내 남동생한테 버럭버럭 소리만 질렀던 생각이 나네요..
    -_-;;;
    고소공포증이 있어갖구말이져…

    1. 우리가 등산간 날도 차가 몇대가 올라오더군요.
      자전거로 온 사람들은 엄청많았구요.
      근데 그럼 뱅기는 어떻게 타셔요?
      난 처음엔 순천으로 놀러가신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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