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죽음과 부활

Photo by Kim Dong Won

남자는 며칠째 죽어 있었다. 아니, 며칠째가 아닌지도 모른다. 한달여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며칠째라고 생각한 것은 죽음의 기간이 너무 길게 연장되고 있는 것에 대해 죽은 몸이 저항하면서 나온 말의 수사학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심장은 멈춰 있었고, 폐는 호흡법을 잊은지 오래였다. 남자는 그렇게 죽어 있었다.
남자는 가끔 멈춘 심장으로 외출을 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표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가 모르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 보겠는가. 세상에 어느 누가, 저 표정은 죽은 사람의 것이야, 저 사람은 빨리 데려다 어느 무덤에 매장을 시키던가, 화장을 해버려야 해, 라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사람들을 설득하려 들겠는가. 또 누가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의 심장에 손을 넣어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려 들겠는가. 누가 그의 코에 손을 대고 허파를 드나드는 그의 숨결을 미세하게 짚어보며 죽음을 확인하려 들겠는가. 단지 거리를 멀쩡하게 걸어다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며칠 동안 죽은채 가끔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남자는 매일 내일 아침쯤 자신의 죽음이 발각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의 죽음은 발각되지 않은채 며칠을 끌고 있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남자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화가 나면 언제나 말을 닫아거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화가 난 것 치고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퍼뜩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깨닫게 되었다.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남자가 화를 낸 것 같았던 그 날, 바로 남자가 죽었다는 것을.
외출했던 죽은 남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남자는 컴퓨터를 켜고 몇 가지를 확인하며 이것저것을 했으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죽은 몸은 무거우나 정작 죽은 당사자의 느낌은 정반대였다. 삶이 텅빈 몸은 극도로 가벼워졌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바닥으로 몸을 눕혔다. 몸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낮게 가라앉았으나 몸에 대한 느낌은 몸을 버리고 공중으로 3mm 가량 부양되어 있었다. 몸을 가라 앉힌 것은 죽음의 피로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죽은 몸의 느낌이 가벼운 것은 그 죽은 몸이 잠시 모두 버린 삶의 무게 때문이었다. 몸의 느낌은 가벼웠으나 몸을 버린 느낌의 부양은 3mm 가량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3mm의 부양만으로 죽은 몸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건넌방을 쓰는 여자가 남자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서 남자의 곁에 몸을 눕혔다. 사체는 여자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도 사체가 방에 누워있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여자가 남자의 얼굴 가까이 그녀의 얼굴을 붙였을 때 여자의 숨결에서 잘 발효된 맥주향이 확 밀려왔다. 그때 남자는 알게 되었다. 여자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 붙일 때 그의 몸에서 코의 후각 세포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이제 그의 몸에서 코가 다시 살아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남자는 여자가 두 병 정도의 맥주를 마셨으려니 짐작을 했다. 죽어있는 동안, 남자는 거의 매일 동네 대형마트에서 다섯 병을 묶어 만 원에 세일하는 맥주를 집안으로 나르곤 했고, 이상하게 냉장고 속에 넣어둔 맥주는 그가 두 병을 먹고 나면 나머지 세 병은 냉장고 속에서 그 흔적을 지웠다. 남자는 이제 짐작이 갔다. 두 병을 먹고 난 뒤 흔적을 지운 맥주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하지만 여자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 막걸리 한 병 내가 다 마셨어. 입에서 술냄새 나지?” 여자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남자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귀에서 청각 세포가 살아났다는 것을. 그녀의 말은 그의 귀속에서 죽어 있던 청각 세표를 다시 살려냈다. 이제 그는 여전히 죽어 있었으나 냄새맡고 들을 수 있었다.
왜 여자는 막걸리를 마셨다고 했는데 여자의 숨결에선 잘 발효된 맥주향이 난 것일까. 여자는 몇 번 남자가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 그의 숨결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막걸리 냄새에 이맛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다. 막걸리는 목구멍을 넘어갈 때 혀에 남기는 맛과 속을 넘어간 냄새가 식도를 타고 다시 입밖으로 기어올라왔을 때의 냄새는 전혀 달랐다. 맛은 좋았지만 냄새는 역겨워 견디기가 어려웠다. 맥주는 그렇질 않았다. 맥주는 맥주를 모두 삼킨 뒤에 입안에 남아 숨결에 향으로 녹아나는 냄새를 견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술이었다. 아니 때로 맥주의 향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도 숨결에 올라온 냄새를 맥주향으로 발효시키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입술은 금방 열리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입술을 연 여자의 숨결이 한참 동안 남자의 속을 드나들었다. 맥주향의 숨결이었다. 숨결은 숨결에 반응한다. 하지만 죽어있는 며칠 동안 숨이 끊겼던 남자의 속은 황폐했다. 어디에도 여자의 숨결에 반응할 남자의 숨결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숨결은 남자의 속을 들어갈 때마다 그 황폐한 남자 속에 여자의 숨결을 뿌렸다. 남자의 속에 뿌려진 여자의 숨결은 남자의 숨결이 되었다. 숨결과 숨결이 뒤섞였다. 뒤섞이면서 숨결이 둘을 오갔다. 점점 더 남자의 속에 숨결이 차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자는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에 숨결이 차고, 그리하여 드디어 숨을 쉬게 되자 여자는 손가락 끝을 세워 남자의 몸, 여기저기를 찔러보기 시작했다. 둘의 버릇 때문이었다. 어느 날, 몸을 누르면 알라뷰를 기계적으로 내뱉던 곰인형을 구경한 뒤로 둘은 곰인형과 똑같은 버릇을 몸에 들였다. 그때부터 둘은 손가락을 세워 몸의 어딘가를 누르면 기계적으로 알라뷰를 내뱉어야 했다. 이상하게 손가락으로 몸을 찌르면 몸이 약간 비틀리면서 알라뷰가 입을 튀어나갔다. 가끔 여자는 손가락을 끝을 세워 남자의 몸을 여기저기 찔러보며 반복적으로 흐르는 알라뷰를 듣는 것이 그녀의 재미였다. 그러나 죽은 남자의 몸은 더이상 여자의 손가락 끝에 반응하지 않았다.
여자가 옷을 벗었다. 옷을 벗은 여자는 그때부터 체온으로 감지된다. 남자는 즉각 깨달았다. 여자도 죽어있다는 것을. 남자가 그것을 감지한 것은 손끝에 묻어난 여자의 체온 때문이었다. 여자를 안은 남자의 손가락 끝이 여자의 등에 얹혀 있었고, 그 손가락 끝에서 여자의 몸이 싸늘한 체온으로 묻어났다. 남자에게는, 몇 번, 여자의 싸늘한 체온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남자는 깨달았다. 이제 자신에게 체온을 감지하는 손끝의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여자가 옷을 벗고 맨몸이 되었을 때, 바로 손가락 끝에서 자신의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여자는 그 싸늘한 몸에, 아직 남아있는 체온을 모두 모아, 남자의 몸에 밀착시켰다. 밀착된 몸의 체온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건너간다. 건너간 체온은 남자가 잃은 체온을 일으키고, 남자에게서 일어난 체온은 다시 여자에게로 건너가 여자의 몸에서 체온을 일으킨다. 체온은 그렇게 몇 번의 순환을 거치면서 뜨겁게 달아오른다.
체온을 모두 되찾은 남자는 드디어 여자의 속에 들었다. 길고 오랫동안 여자의 속에 있었으나 남자는 사정하지 않았다. 여자의 속을 들었으면서 사정하지 않은 것은 남자에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격렬하고 뜨거운 몸의 포옹이었다.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으며 호흡의 폭과 걸음거리도 급했다. 둘은 서로를 뛰어다녔다.
다시 평온이 찾아오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가 여자의 속에 뒤섞였던 자신의 몸을 거두어들였을 때 여자는 불에 타 재만 남았다. 남자도 그 불길에 휩쓸려 재만 남았다. 재가 된 여자의 곁에 재가 남자가 누워있었다.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땀의 물기가 재가 된 둘의 몸에 아직도 남은 불기를 서서히 잠재웠다. 여자가 조용히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남녀란 그렇다. 항상 뜨겁게 불에 타죽으나 재로부터 부활한다. 그 부활이 끝날 때 그들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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