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일이 겹쳐 마무리를 재촉하고 있었지만 The보리로 술마시러 가자는, 정확히는 먹태맛을 보러가자는 친구의 연락에 일은 그만 뒤로 밀리고 말았다. The보리는 일산의 풍동에 있는 맥주집이다. 같이가자고 또다른 친구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금요일은 집과 회사의 활동 반경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또다른 한 명을 섭외하여 셋이 모이기로 했다. 강북과 강동, 강남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둘이 먼저 만나 늦는다고 전갈이 온 또 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둘은 기다리는 시간을 버스 정류장 옆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한잔 하는 것으로 채웠다. 기다림을 맥주로 채워가는 시간은 나머지 한 명이 올 때쯤 정확하게 잔의 바닥을 비웠다.
셋은 서울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들이 타고갈 일산행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버스 번호는 M7119였고, 우리는 버스 앞에 왜 M이 붙냐며, 혹시 남자들만 태워주는 버스는 아니냐는 쓸데없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우리의 농담을 불쾌하게 감지했는지.. 버스는 정류장에 서질 않았다. 우리는 여기가 아닌가벼라며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정류장의 위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셋은 조금 아래쪽으로 걸어내려가서 다른 정류장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서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우리는 두 정류장에서 기다림을 허비하며 지나가는 버스를 닭쫓던 개처럼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개처럼 짖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금 으르렁거리며 짖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The보리에 가보자며 우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길은 많이 막혔지만 술에 관한 웃기는 얘기를 하나 했더니 갑자기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차의 속도를 올렸다. 아저씨는 거의 새치기의 신기를 보여주며 그 막히는 퇴근길에서 차들을 끊임없이, 그것도 빠른 속도로 뒤로 밀어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시냐고 했더니 우리가 하는 술 얘기를 들었더니 빨리가서 술을 드시게 해야 겠다는 막중한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아저씨의 새치기 솜씨가 워낙 신기에 가까워서 다른 차들이 아저씨가 새치기한 것이 아니라 저 차가 원래 내 앞에 있었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라고 아저씨의 운전 솜씨를 한껏 치켜세웠다. 아저씨는 칭찬을 들으니 점점 더 솜씨를 발휘하게 된다며 차를 몰고 거리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거리를 휘젖는 수준으로 정말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우리들을 The보리의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아저씨에게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 전에 아저씨에 대한 감사기도를 먼저 올리겠으며 할렐루야를 세 번 외친 뒤 오늘의 술자리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항상 그렇듯이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The보리에 도착했다. 보고 싶었던 얼굴, The보리의 주인장 윤병무 시인을 만났고, 그가 내준 먹태 안주에 대해 이거, 진짜 맛있다는 말을 먹을 때마다 거의 자동에 가깝게 되풀이하며, 맥주를 마셨다. 잠시 짬을 내 자리를 같이한 시인과 90년대로 거슬러 오르는 아득한 옛추억을 더듬기도 했다. 나는 윤병무 시인에게 친구 두 명에게 그의 시집을 사도록 강권하겠다고 했으나 시인은 내 친구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새겨 그의 시집을 건네주었다.
술값은 친구가 내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술값을 내려던 친구는 말이 안된다며 우리가 마신 술의 양만해도 어디인데 이렇게 적게 나올리가 없다고 했다. 시인과 내 친구 사이에선 적게 받으려는 사람과 더 내려는 사람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에 당황한 내 반응은 나는 모르겠으니 알아서들 하라며 바깥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올 때는 셋이, 우리가 서울에서 그렇게 놓쳤던 그 버스를 탔다. 버스타는 것도 일종의 한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밤에 알았다. 버스의 운전기사 아저씨는 서울에서 버스를 닭처럼 보내며 개처럼 짖을 뻔 했다는 우리 얘기를 듣더니 우리가 기다린 정류장에서 서긴 서는데.. 그냥 지나갈 때가 더 많으며,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 버스가 그 정류장에서만큼은 수신호 체계로 사람을 태운다는 것을 그때 알았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성을 아저씨는 그곳의 정류장에 들러 사람도 못태우고 까먹게 되는 시간으로 정확히 짚어주었다. 아저씨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수신호 체계를 채택한 버스 운전기사들의 시간에 쫓기는 삶도 이해하게 되었다. 인터넷은 길은 알려주는데 그런 정보는 전혀 알려주질 않는다도 사실도 알게 되었다. 종종 오프라인에서 얻어듣는 얘기에서만 삶의 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광화문에서 내린 우리는 그곳에서 북으로, 남으로, 그리고 동으로 흩어졌다. 나는 막차를 여유있게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겐 자그마치 7분의 여유가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했다. 12분이 남아 있었으면 이장군의 흉내내는 재미가 있었을텐데. 아직 신에게는 12분의 열차 시간이 남아있사옵니다라고.
집에 와서 포장해온 먹태를 내놓으니 그녀가 이건 그동안 자신이 먹었던 먹태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한참 위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런 먹태를 만들 수 있기까지 7년 세월이 걸렸다고 하더라는 시인의 얘기도 함께 전했다. 그녀와 나는 The보리의 먹태를 안주로 맥주잔을 기울였다. 같이간 친구들이 모두 미모의 여자 친구들이었다는 얘기는 자세하게 하지 않았다.
2 thoughts on “일산 풍동의 맥주집 The보리 방문기”
포장 막태와 미녀 친구들에 관한 막판 반전 이야기가 솔깃한데요.^^
The보리로 시작된 하룻밤 이야기를 더 보리!
저에겐 간만의 수다자리이기도 했는데 두 여인이 말할 때마다 배꼽잡고 웃어줘서 고맙기도 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