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立場)이란 말은 한자를 그대로 풀면 서 있는 곳이 된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본 관점이 나의 입장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내 입장도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입장은 영어로는 position이다. 영어 또한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우리의 입장이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김소연의 시집 『i에게』에선 그 입장이 충돌하거나 전복되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
그 사례를 체험해 보기 위하여 먼저 목화밭으로 가보기로 한다. 목화밭으로 가면 우리는 “목화밭 앞에서 씨익 웃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실존하는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시인이 “그녀를 상상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매일 아침” “목화씨가 발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목화가 병충해 없이 잘 자라면 그녀는 “목화를 수확”할 수 있게 된다. “껍질을 벌리고 솜이 튀어나오는/그녀의 목화”를 갖게 될 그녀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입장일 뿐이다. 목화밭에는 전혀 다른 입장의 생명체가 있다.
잎말이나방의 유충이
들끓던 이파리의
고충이 아니라
숨기 위해
이파리를 돌돌 말고 그 안에다 알을 까야 했던 유충의
고충에 대하여 상상한다
유충을 박멸해야 목화가 자란다
들끓는 것을 제거해야 소원을 이루는
무더운 여름의 무서움에 대해 생각한다
—「너머의 여름」 부분
여름은 목화가 한창 자라는 계절이다. “목화솜을 따는” 시기를 기다리는 그녀에겐 여름이 좋을 것이다. 허리를 구부리는 게 어려워 “혼자서 양말을 신는 게/소원”일 정도인 그녀로선 “양말을 신지 않”아도 되는 여름은 더없이 좋은 계절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입장에 섰을 때의 얘기이다. 시인은 그녀의 입장뿐만이 아니라 유충의 입장을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세워놓는다. 유충의 입장은 거의 고려되는 경우가 없다. 유충의 입장에선 목화밭에 농약을 뿌리는 여름이 무섭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시인에 의하면 “어느 과학자”는 “무려 25초 동안이나” “태양의 흑점을 너무 오래 쳐다”본 탓에 “눈이 멀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보다. 눈이 멀었는데도 그 과학자는 “좋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건 과학자의 입장이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고, 당사자가 좋았다고 하는 데도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더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도 있다. 케이크 위에 파리가 앉아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파리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
무려 25초 동안이나
이 아름다운 나의 케이크 위에
앉아 있던 파리의
그 좋았던 시간에 대하여
—「사갈시」 부분
시인은 파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시의 제목인 사갈시는 어떤 대상을 몹시 싫어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케이크 위에 파리가 앉아 있으면 그 파리를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싫어도 몹시 싫다. 그러나 그 몹시 싫은 시간이 파리에게는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겠는가. 파리가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도 우리는 그 입장이 싫다. 그래도 시인은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있다.
시인이 세상의 다양한 입장을 두고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 사례는 “탁상시계를 던져본 적이 있다”는 시인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손아귀에 적당했고 소중할 것도 없었던 것을//방바닥에 내던져/부서뜨려본 적이 있다”는 설명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탁상시계에 무슨 입장이 있겠는가 싶지만 탁상시계에게도 입장이 있으며, 그 입장은 “부서지는 것은 부서지면서 소리를 냈다/부서뜨리는 내 귀에 들려주겠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말에 요약되어 있다. 부서질 때 내는 소리가 탁상시계의 입장인 셈이다.
탁상시계의 입장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부당하게 직장을 쫓겨나 해고의 고통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를 생각하면 그 입장을 체감하기가 아주 수월해질 것이다. 그 노동자가 비정규직이었다면 “손아귀에 적당했”다는 구절까지도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탁상시계는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고작 5분도 안 걸리는 사이에 감아주는 태엽의 힘이나 몇 푼 가지도 않는 건전지 몇 개를 던져주었지만 탁상시계는 아무 말 없이 성실하게 시간을 밀고 가며 일을 했다. 그만한 성실한 노동자도 없다. 대개의 노동자가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흐를 수가 없고 회사들이 굴러갈 리가 없다. 그런 성실이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부서지는 소리로라도 그 부당함을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입장에 서면 부당한 해고 맞선 노동자들이 모여 시위하고 고공에 올라 항의하는 것은 당연해진다.
“고백이 적힌 편지를/맹세가 적힌 종이를//두 손으로 맞잡고/천천히 찢”는 행위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종이는 “가벼운 것”이지만 시인은 “찢어지는 것도 찢어지면서 소리를” 내며 “찢고 있는 내 귀에 기어이 각인되겠다는 듯 날카롭게/높은 소리를” 낸다고 말한다. 역시 부당하게 해고되어 버려지는 노동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쓸데없이 보이던 입장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경우가 있다. 입장을 갖지 못하는 경우이다.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져간다
다 망가지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는 것이다
기억에만 귀를 기울이며 지나간 소리들을 명심하느라
조용히 오래오래 내 귀는 멀어버렸다
—「손아귀」 부분
말하자면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런 입장을 갖지 못한다. 사회에선 지위가 올라갈수록 자본이나 권력의 대리인이 되기 쉽다. 자본과 권력은 대리인들을 시켜 사람들을 수탈하며 자기 이익을 챙기려 든다. 그때 자본과 권력의 손아귀 속에 잡히는 것은 탁상시계나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부딪치는 두 입장의 관계에서 약자의 입장을 부단히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목화밭의 유충과 케이크 위의 파리 입장을 살피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입장을 섬세하게 살피다 보면 길가의 돌멩이에서 젊은이들의 삶이 보일 수 있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 집을 만들고 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년년 살고 싶다면서.
—「i에게」 부분
젊은이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부당한 삶에 짓눌려 위축이 되면 돌멩이로 바뀐다. 눈물을 안으로 삼키면서 말은 한마디도 못 하는, 말하자면 자기 입장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을 자신의 집으로 삼으려 들게 된다. 시인의 눈에 길가의 돌멩이들은 돌멩이가 아니라 이 땅의 젊은이들이 돌멩이로 바뀐 것이다.
입장의 가장 큰 문제는 두 입장이 공존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두 개의 입장이 충돌하면 대개 약자의 입장은 자리가 없다. 강자의 입장만이 있고 약자는 그 입장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편견마저도 강자의 것은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는 걸 잘 아니까
선생님의 편견은 부당하게도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내 방에서 하는 연설」 부분
그렇게 낯선 얘기가 아닐 것이다. 갑질 문화의 폐해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요즘의 상황에선 더더욱 낯이 익은 얘기이다. 그러면 이런 세상에서 약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약자는 얼굴을 잃는다. 몸만 우리의 것이 된다.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바깥」 부분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내면과 유리된 바깥의 얼굴을 갖고 살고 있다. 때문에 시인에 의하면 ‘얼굴’은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시인이라도 멋대로 살아야 한다. 멋대로 사는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멋대로 듣고 멋대로 본다
—「남은 시간」 부분
시인이 그렇게 살아야 겨우 이 사회가 지워버린 다양한 입장들이 시 속에서 나마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지워진 입장들이 일반적이거나 강자의 입장을 전복시키며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세상이 바로 김소연의 시 속에 있다.
(『포지션』, 2018년 겨울호, 시집평)
2 thoughts on “입장의 전복 —김소연 시집 『i에게』”
무언가를 읽어낼 때에는 애정을 가진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동원님의 글을 읽을 때 마다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못 쓰겠더라고요.
공연 예술과 음식에 어마어마한 애정을 갖고 있잖아요. 박대리가 쓴 그런 글들 읽을 때마다 따라갈 수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