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촌의 <바다>에서 술을 마셨다. 김인태와 마셨다. 뉴욕에서 온 청년이다. 술자리는 저녁 다섯 시에 시작되었다. 술자리를 시작할 때 우리의 무게는 각자 가진 몸무게만큼 무거웠다. 술을 비워갈수록 술은 비례하여 우리 몸의 부력이 되었다. 우리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러나 몸의 부력은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중력의 자장을 뿌리치는데 사용되지 않는다. 몸의 부력은 우리 몸에 억눌려있던 모든 말들을 몸밖으로 내보내 우리들이 술을 마시는 공간을 마음대로 떠다닐 수 있도록 해준다. 몸의 부력이 띄워올린 수많은 말들이 <바다>를 가득채웠다.
술을 마시는 사이, 낯 모르는 사내가 앞문으로 들어와 정수기 쪽으로 가더니 물을 한잔 마시고는 아주 익숙하게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사내는 나중에 두 명의 사내를 더 이끌고 다시 돌아왔으며, 우리와 자리를 합쳐 같이 앉은 뒤 5분도 안되어 김인태와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술은 낯선 사내를 순식간에 우리의 형제로 뒤섞어 주었다.
시간이 밤 12시에 가까워질 무렵 문을 닫아걸었으나 또다른 낯 모르는 사내가 닫힌 문을 열어달라더니 익숙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와 우리 곁에 앉았다. 그는 바다는 씨, 에스 이 에이라고 했다. 내가 이곳의 바다는 시(詩), 스펠링은 피 오 이 엠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사내가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는 몇 개의 영어를 더 풀어놓더니 떠났다.
대개의 낯선 사내들은 다른 자리에 앉아 말없이 술을 마시고는 자리를 털었으나 한 사내는 유심히 나를 살폈다. 그는 내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나는 그의 궁금증에 대해 나는 구석기 시대에서 왔으며, 이곳까지 오는데 3만년이 걸렸다고 말해주었다. 머리까지 내려온 나의 긴머리 때문인지 그는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말 하나로 모든 의구심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러면 왜 돌도끼가 없냐고 했다. 나는 며칠전 택배로 신청했는데 아직까지도 도착을 안해 그냥 빈손으로 왔다고 했다. 이제 그는 드디어 완전한 믿음을 얻은 눈치였다.
밤 두시쯤 몸의 부력을 더이상 견디지 못한 나는 김인태를 바다에 버려두고 바다를 나왔다. 술의 부력은 이제 내 몸을 부양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나는 그 술의 부력에 몸을 싣고 취객들이 비틀거리는 거리를 둥둥 떠가고 있었다.
김인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술에 취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몸에선 연어처럼 우리들을 우리들의 거처로 회귀시키는 자동항법장치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몸의 부력에 밀려 우리 몸을 뛰쳐나가는 말들을 따라 우리의 기억도 우리의 몸밖으로 따라나간다. 기억이 몸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때부터 기억은 우리의 몸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기억이 몸을 지운 그 술취한 밤에도 놀랍도록 정확히 우리는 우리의 거처로 회귀한다. 술에 취하면 우리 몸에 연어가 돌아오고 그 연어가 우리의 거처가 그들의 거처인양 그곳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술취한 밤, 세상의 모든 취객들은 그들 몸안의 연어를 따라 그들의 거처로 회귀한다. 그러니 인태는 아마 잘 회귀했을 것이다.
2 thoughts on “평촌의 <바다>에서 김인태와 술을 마시다”
도대체 몇 시간을 달리신 겁니까.^^
분위기는 단출한 게 까모메 식당 느낌을 주네요.
처음에는 주변의 술집들을 순례하며 5차 정도 가볼까 했는데 입구의 왼쪽 테이블에서 시작한 뒤에 오른쪽 테이블로, 그리고 다시 안쪽으로 갈아타며 이곳의 테이블을 모두 섭렵하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ㅋㅋ